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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바깥에서 박사하기
한국 바깥에서 박사하기
  • 김지윤
  • 승인 2023.04.17 09: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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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
김지윤 시카고대 영화·미디어학과 박사과정

온라인 SNS에서 화제가 된 『한국에서 박사하기』를 구해 읽는 과정은 매우 복잡했다. 온라인으로 책을 구매해 친구 집으로 보냈고, 그 친구는 다시 미국에 있는 나에게 택배로 보내 주어야만 했다. 이렇게까지 해서 이 책을 읽어보려 했던 이유는, 책이 제시하는 문제의식에 필자도 절박하게 공감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유학하는 입장에서 이 주제에 말을 얹는 것이 어떻게 비칠지 몰라 이 글을 쓰는 것이 망설여지기도 했다. 하지만 나 스스로가 여전히 한국 학계의 일원이라 생각하고 있는 만큼, 학계의 미래에 대해 함께 논의하고 참여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미국 한인 유학생들 사이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대화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한국 대학원생들은 미국 박사과정 유학생들만큼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다며 한국의 학계를 낮게 평가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필자의 입장에서는 그 같은 평가에 결코 동의하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주로 한국 학계를 경험해 보지 못한 채, 미국 학계와 한국 학계의 위계를 내면화한 평가라고 생각된다. 필자 역시 지금 미국에서 영어로 학술적인 글쓰기와 말하기를 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 받은 이론적인 훈련이나 공부의 양이 미국 학생들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는 않는다고 자부한다. 

그럼에도 나는 왜 한국의 박사과정 대신 미국 유학을 선택했는가? 물론 필자 나름대로 설계한 학문적인 인생과 목표를 비롯해 여러 요소를 고려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중요한 요인은 재정적으로 안정적인 환경 위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박사과정 학생들에게 기본적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제공해주는 미국의 시스템은 나에게 커다란 기회다. 학교를 다니기만 해도 돈을 준다니…, 그것도 나 같은 인문사회학 전공자에게도 말이다! 유학생들이 부유하다는 통념이 있는 만큼 경제적인 기회 때문에 한국 박사과정이 아닌 해외 유학을 선택했다는 것은 모순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한국의 박사과정을 선택했다면 지금의 연구생활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을 것이다. 학교와 알바를 병행하면서 장학금을 얻기 위해 여러 군데 지원서를 쓰는 데 시간을 쏟거나, 나에게 기회가 주어질지 확신할 수 없는 프로젝트에 의존하면서 박사과정을 이수해야 했을 것이다.

매달 생활비를 받으면서 수업과 논문에 집중할 수 있는 대학원생들과 매주 장학금 지원서를 작성하고 행정 조교 업무에 시달려야 하는 학생 중 누가 더 연구에 집중할 수 있을까? 설령 같은 선상에서 연구를 시작했다 하더라도 몇 년 후 그 결과는 매우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아무 자원이 뒷받침되지 않는 상황에서 ‘김연아’와 ‘손흥민’이 나올 수는 없는 법이다. 물론, ‘김연아’와 ‘손흥민’도 제도와 시스템이 아니라 부모와 가족의 헌신이 있어 가능했던 매우 특별한 예외적 현상임을 놓치지 말아야 하지만 말이다.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동료들을 보며 놀란 점 중 하나는 인문학을 전공한다는 점에 자부심을 감추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것이 단순히 한국/미국 대학원생의 마음가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결국, 낸시 프레이저와 악셀 호네트의 논쟁을 떠올리면서 인정과 분배는 궤를 같이 하는 것은 아닐지 질문하게 된다.

한국에서 어떤 사람들이 학계에 남을 수 있는지는 말과활아카데미,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등 외부기관에서 진행하는 세미나 모임에 참여해보면 더욱 명백해진다. 필자는 이런 세미나에서 나 스스로를 전업 대학원생이라고 말하기가 부끄러워질 정도로 뛰어난 아이디어와 열정을 가진 많은 “학계 외부”의 사람들을 만났다. 그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단지 “현실적인 이유”로 대학원에 진학하는 대신 직장을 갖고 취미의 영역에서만 학문과 이론 연구를 선택했다.

그러나 이들의 글들은 반짝이는 가능성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체계적인 지도나 피어 리뷰의 기회를 얻지 못한다. 게다가 해외 유학이라는 선택지가 학문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있는 것도 아니다. 언어가 장벽이 되고, 유학을 준비하는 데에도 돈이 든다. GRE 학원을 다녀야 하고, 인문학 혹은 사회과학에서 질적 연구를 하는 토종 한국인이라면 아마 자소서와 라이팅 샘플 첨삭도 받아야 할 것이다. 합격을 받았다고 해도 미국으로 날아갈 비행기 표가 있어야 하고, 스타이펜을 받기 전까지 한 달간 생활할 수 있는 돈도 있어야 한다.

한국 학계는 대체 무엇 때문에 재능 있는 사람들을 놓치고, 어떤 사람들만 남도록 하는가? 『한국에서 박사하기』의 저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인문 사회계열 지식이 사회적 자원을 더 모으기 위해 과거의 사회적 위상을 되찾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 역시 지금의 한국 사회가 맞닥뜨린 여러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서는 한국 인문사회학계가 더 많은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믿는다. 『한국에서 박사하기』는 분명 중요한 화두를 던져주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이 화두가 발전적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느냐 여부이다. 그것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우리 자신들의 몫이다.

김지윤 시카고대 영화·미디어학과 박사과정
연세대에서 언론홍보영상학과 문화인류학을 공부하고, 커뮤니케이션 대학원에서 미디어문화연구를 전공했다. 여성 게이머의 게임 플레이 경험을 분석한 석사학위 논문으로 2020년 한국여성커뮤니케이션학회 우수 학위논문상을 받았다. 현재 미국 시카고대학 영화·미디어학과 (Cinema and Media Studies) 박사 과정에서 게임문화를 연구하고 있다. 최근 출간한 『여성 게이머는 총을 쏠 수 있는가』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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