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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직으로 서더라도 생각은 수평으로 눕혀야
수직으로 서더라도 생각은 수평으로 눕혀야
  • 이종찬
  • 승인 2023.05.15 09: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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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선약수(上善若水)의 진리를 되새기길

만물의 존재 중에서 사람이 언제부터 곧게 서는 직립 동물이 되었을까? 만물의 유형적 분류인 비(飛)-잠(潛)-돈(動)-치(植, 세우다, 심다일 때의 독음은 치임)에서 움직이는 동물로 분류되어 모든 동물의 움직임은 네 발 이상으로 기어가게 되었으나 사람만은 두 발로 서서 걷으면서 스스로 영장이라 자처한다. 곧게 서 있음은 동물의 수평 이동이 땅 위에 서 있는 식물의 수직을 닮았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도 사람의 사고기능이 이 수직의 형상이 수평으로 걷게 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느껴서이다. 삶이 시간적 수직과 공간적 수평의 교차적 이동이기에 이 가로 세로의 생각이 균형을 유지해야 할 터이다. 그런데 우리는 역사적 흐름 속에서 알게 모르게 수직적 사고로 얼룩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자연스러운 형상은 농업문화로 이루어진 결과일 수도 있겠다. 농업문화는 식물에 의존하는 문화이니 자연스러이 수직일 수밖에 없다. 우리 동양 문자문화의 기록물이 세로로 써 온 것도 우연이 아니다. 상업문화라 할 수 있는 서구의 기록문화가 가로였음과 대비해 보아도 쉽게 이해되는 점이다.

그래서였을까, 우리는 문화를 이해할 때 알게 모르게 수직 구조로 이해한다. 가장 비근한 예가 윤리의 기본인 오륜(五倫)을 수직 논리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부자유친의 아비와 아들이나 군신유의의 국가와 국민은 어디까지나 균등한 인격체로 맞서는 상대 개념이지 강약이나 선후의 수직 개념이 아니다. 이러한 개체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 양자가 서로 노력해 이루어야 할 공동의 덕목이 각기 ‘친(親)’이요 ‘의(義)’인 것이다. 어디까지나 수평 윤리이지 수직 윤리가 아니다. 이 수평을 유지하기 위하여 각기 노력할 것이 부자자효(父慈子孝)요 군의신춘(君義臣忠)이다. 아비의 몫은 자비의 사랑이고, 아들의 몫은 부모에 대한 공경의 효도이다. 국가는 의리를 앞세워야 하고, 국민은 국가에 충성해야 한다. 남녀평등은 부부유별 이상의 덕목이 없다. 이 유별이란 부부라도 상대방을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다. 장유유서가 시간적 선후라는 고정관념에서 수직의 윤리일 듯하지만, 형우제공(兄友弟恭)으로 형의 우애와 아우의 공손은 개체의 인격을 존중함이 기본이다. 이렇듯 오륜이 인격 평등을 기본으로 한 전형적인 평등 윤리인 것이다.

이러한 상하의 수직구조를 인격적 평등인 자연질서로만 강조하다 보니 인위적인 조직구조로서의 통솔이 어려워져 구상된 것이 삼강(三綱)일 것이다. 부위자강(父爲子綱).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이다. 아비는 자식을 위하여 기강을 잡아 주고, 국가는 국민을 위한 기강을 세워 주고, 남편은 아내를 위하여 힘이 되어 주어야 사회질서가 선다는 것이다. 오륜의 자연질서의 취약점을 삼강의 인위질서로 잡아 주어야 한다는 것이디. 이 얼마나 완벽한 조직인가. 강긴목장(鋼緊目張)이다. 그물의 벼릿줄이 당겨져야 그물코가 펴진다. 한 집안의 아버지가 벼릿줄을 당겨야 한 가정의 그물코가 펴져 그물의 역할을 한다. 국가의 벼릿줄이 당겨져야 국민 각자의 자리인 그물코가 펴진다. 긴장(緊張)이란 말의 어원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긴장의 반대어가 무엇인가. 이완(弛緩)이 아닌가. 이완이란 기강이 풀리고 조직이 느슨하다는 뜻이다. 오늘 우리 사회가 혼란하다면 바로 긴장이 없어 이완된 탓이 아닌가. 여성의 지위가 아무리 높아도 남편은 좀 굳세기를 바라는 것이 일반적인 여성의 심리가 아닐까. 부위부강일 때 그 가정이 평안할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이렇듯 동양윤리는 평등이 기본이다. 오늘 우리는 가로쓰기를 하면서 생각은 왜 세로쓰기 세대로 세워 놓는지 모르겠다. 이제 생각을 눕히자. 유행되고 있는 단어 몇 개만 생각해 보자. 상호 관계 속에 요즘 ‘갑질’이란 말이 예사롭게 쓰이는데 이도 수평구조를 수직구조로 잘못 이해한 단어 사용이다. 갑질의 갑은 을(乙)과 맞서는 갑(甲)인데, 상위인 갑이 하위인 을에 부당하게 가하는 압력으로 사용되니, 잘못도 이만저만한 잘못이 아니다. 이것도 수평문화의 수직적 오류이다. ‘흑백논리’란 말은 논리의 일반성을 말함인데, 마치 흑과 백으로 맞서는 고집으로 보아 잘못된 논리의 전형처럼 말한다. 논리가 성립하려면 검거나 흰 색깔이 다른 논리의 대립이 있어 성립되는 것이고, 여기에 시비를 가리되 옳은 것에 이론 없이 승복하는 것이 바른 사고인데, 흑백논리 자체가 모순된 논리로 전제되다 보니 논리의 틀부터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는 것이 지식인들의 일상적 오류이다. 사소한 오류 때문에 수평적 사회관계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나만 옳고 남은 그르다는 사고도 내 생각을 수평으로 균형잡지 못하는 속 좁음이다. 왼편이 있으면 오른편이 있어야 균형이 잡힌다. 갑작스러운 사회변화에 좌우익의 왼편 오른편을 균형 잡지 못한 결과라 보여 오늘의 시대 상황이 원망스럽다. 

 

이종찬 동국대 명예교수는 직립으로 걷더라도 생각은 평안한 수평으로 갖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사진=픽사베이

직립으로 걷더라도 생각은 평안한 수평으로 갖자. 여기서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의 진리를 되새기게 된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수평이라야 평안하다. 그만 쓰고 침대로 가 누우련다.

 

 

 

이종찬
동국대 명예교수·국문학
동국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문학 연구에 정진, 학계 최초로 禪詩를 연구해 불교문학으로 위상을 정립했다. 无涯 양주동 박사에게 사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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