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8 01:05 (일)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146] 가장 위험한 아나키스트 엠마 골드만의 생애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146] 가장 위험한 아나키스트 엠마 골드만의 생애
  • 박홍규
  • 승인 2023.06.26 08: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엠마 골드만
엠마 골드만(Emma Goldman, 1869~1940). 출처=위키피디아

골드만은 1869년 6월 27일, 리투아니아의 제2 도시인 카우나스(Kaunas)에서 태어났다. 골드만의 아버지는 전형적인 유대인으로서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생각의 소유자로서 자녀들에게 폭력을 행사했고 여성의 기능은 오로지 결혼하여 아이를 낳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골드만이 태어나자마자 가난으로 인해 가족은 여러 곳으로 이사했고 반년 실업학교에 다닌 것 외에 교율을 받지 못하고 일을 해야 했다. 그러다가 체르니솁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고 충격을 받고 가족이란 의무나 전통이 아니라 이상에 의해 창조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골드만은 소설에서 그려진 성적으로 자유롭고 개인적인 선택이 가능하며 정치나 도덕의 전제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를 동경했다.

 

골드만의 평생의 동료이자 연인, 버크만

1884년 12월 미국에 이민을 가서 재봉사로 일하며 임금인상을 요구했다가 거부당한 골드만은 1887년 유대인 노동자와 결혼하지만 1년 만에 이혼했다. 그전 해에 터진 헤이마켓 사건을 계기로 아나키즘에 관심을 갖게 된 그녀는 뉴욕으로 갔다.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알렉산더 버크만(Alexander Berkman)을 만나 평생의 동료이자 연인이 되었다.

골드만과 버크만은 폭력혁명을 주장한 요한 모스트(Johann Most)의 연설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1892년 골드만과 버크만은 카네기가 소유한 홈스테드 철강회사의 파업에 참가했는데 파업 직후 회사가 고용한 핑커튼 경비원과의 무력 충돌로 7명의 경비병과 9명의 파업노동자가 사망했다. 그 직후 골드만과 버크만은 자본가를 암살하기로 결정하였으나, 버크만은 암살에 실패하고 22년을 선고받았다.   

골드만과 그녀의 애인 버크만. 

1893년 공황으로 실업률은 20%를 넘어섰고 ‘굶주림 시위’는 폭동으로 이어지자 골드만은 ‘폭동 선동’혐의로 구속되어 1년형을 선고받았다. 재판에서 검사와의 다음과 같은 문답은 유명하다.

검사 : 골드만 양, 최고 존재를 믿습니까?

골드만 : 아니요, 저는 믿지 않습니다.

검사 : 지구상에 당신이 승인하는 법을 가진 정부가 있습니까?

골드만 : 아닙니다. 그것들은 모두 인민에게 반하기 때문입니다.

검사 : 법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 나라를 떠나지 그래요?

골드만 : 어디로 갈까요? 지구상의 모든 곳에서 법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불리하며, 그들은    나에게 천국에 갈 수 없고 가고 싶지도 않다고 말합니다.

 

감옥에서 에머슨과 소로, 호손, 휘트먼, 밀의 책을 읽었고 출옥 후 영국에서 말라테스타, 루이스 미셸, 크로포트킨을 만났다. 1901년 9월, 대통령 멕킨리 암살로 인해 골드만은 다른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2주 구금 후 석방되었다.

그 뒤 골드만은 동료 아나키스트들에게 경멸을 당하고, 언론으로부터 비방을 받고, 버크만과 헤어지는 등 괴로운 시기를 보냈다. 그러나 1903년의 아나키스트 배제법이 제정되자 그것이 언론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골드만과 동료들은 그 법에 반대했다. 이어 1906년에는 ‘예술과 문학 분야의 젊은 이상주의자들을 위한 표현의 장소’인 <마더 어스> 출판을 시작하여 프루동, 크로포트킨, 니체, 울스턴크래프트, 입센, 스트린드베리, 하우프트만, 와일디를 비롯한 많은 작가들을 소개했다. 골드만 자신은 아나키즘, 정치, 노동, 무신론, 섹슈얼리티, 페미니즘에 대한 기고하고 초대 편집자로 일했다. 그해 5월에 버크만이 14년 만에 석방되어 <마더 어스>에 동참하고 자유학교 설립에 참여했으나 골드만과는 사이가 멀어졌다. 그해 말에 그녀는 암스테르담 국제 아나키스트 회의에 미국 대표로 참석했으나 아나키스트와 생디칼리스트 사이의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 후 10년 동안 골드만은 쉬지 않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강의를 하고 아나키즘을 전파했다.

 

피임 방법을 적극 알리다

1908년 봄, 골드만은 의사인 벤 라이트만과 사랑에 빠졌다. 그들은 자유로운 사랑을 약속했지만 다양한 연인을 사귄 라이트만과 달리 라이트만에게 충실한 골드만은 질투심을 마음의 자유에 대한 믿음과 조화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2년 후 골드만은 청중에게 좌절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21년 동안의 정신과 영혼의 투쟁’을 담은 『저주받은 아나키즘』을 출판했다.

피임을 옹호하는 마가렛 생어가 1914년 6월 그녀의 잡지 <여성의 반란>The Woman Rebel 에서 ‘피임’ 이라는 용어를 만들고 다양한 방법에 대한 정보를 퍼뜨렸을 때 그녀는 골드만으로부터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1916년 골드만은 피임법을 공개적으로 가르친 혐의로 외설의 유포를 금지한 콤스톡법에 의해 체포되었고, 이어 생거도 체포되었다.

 

<여성의 반란>1호. 출처=위키피디아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진 후 윌슨 대통령은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전 전개가 미국의 참전 이유가 된다고 발표하고 이듬 해 21~30세의 모든 남성에게 징집 등록을 요구하는 선택적 복무법을 재정했다. 자본주의가 주도하는 군국주의 침략이라는 이유로 징집에 저항하고 미국의 전쟁 개입에 반대한 골드만은버크만과 함께 징병 반대 운동을 전개했으나 대부분의 좌파는 호응하지 않았다. 1917년 6월 버크만과 함께 새로 제정된 간첩법에 따라 체포되어 기소된 골드만은 재판에서 소로와 에머슨을 불러 자신의 반대할 개인의 자유를 정당화했지만, 법원은 그것을 부정했다.

골드만은 결국 징역 2년, 벌금 10,000달러, 석방 후 추방 가능성 등 최고형을 선고되었다. 감옥에서 많은 아나키스트들과 사귄 골드만은 1919년 9월에 석방되었다. 당시 전시 친독 활동에 대한 대중의 불안이 볼셰비즘에 대한 만연한 두려움과 임박한 급진적 혁명의 전망으로 확대되었다. 노동조합의 파업과 이민자 활동가들의 행동으로 사회가 불안한 시기였다. 당시 법무부 일반정보국장(현 FBI)이었던 에드가 후버는 골드만과 버크만을 ‘가장 위험한 아나키스트’라고 말하고 추방 청문회에 회부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함께 추방돼다

10월의 추방 청문회에서 골드만은 그녀의 신념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기를 거부하고 마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 소위 외계인이 추방됩니다. 내일 아메리카 원주민은 추방될 것입니다. 이미 일부 애국자들은 민주주의가 신성한 이상인 아메리카 원주민 아들을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골드만과 버크먼이 포함된 249명은 12월에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추방되어 1920년 1월 러시아로 인도되었다.

처음에는 볼셰비키 혁명을 긍정적으로 본 골드만은 그것이 "인간의 자유와 경제적 복지의 가장 근본적이고 광범위하며 모든 것을 포괄하는 원칙"을 대표한다고 썼으나 계속되는 러시아 내전과 반볼셰비키 세력에 의해 체포될 가능성에 대해 우려했다. 공산당 간부가 언론의 자유를 ‘부르주아적 미신’이라고 언급하는 것을 듣고 충격을 받은 그녀와 버크만은 전국을 여행하면서 그들이 꿈꾸던 평등과 노동자 권한의 부여 대신 억압, 부실 관리 및 부패를 발견했다. 정부에 의문을 제기한 사람들은 반혁명분자로 간주되었고 노동자들은 가혹한 조건에서 노동했다. 그들이 만난 레닌은 "혁명 시대에는 언론의 자유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버크만은 ‘역사적 필요성’이라고 변명했지만 결국 소련 국가의 권위에 반대하는 골드만에 합류했다.

1921년 3월, 노동자들이 더 나은 식량 배급과 더 많은 노조 자율성을 요구하며 페트로그라드에서 파업했다. 크론슈타트 반란에서 약 1,000명의 반역 선원과 군인이 죽고 2,000명 이상이 체포되어 뒤에 처형되었다. 골드만과 버크만은 소련에 미래가 없다고 보고 1921년 12월 라트비아의 수도인 리가로 갔다가 베를린에 정착해 뒤에 『러시아에서의 환멸』(1923), 『러시아에서의 환멸 속편』(1924)로 출판된  신문 기사들을 썼다.

헤이마켓 사건으로 처형된 무정부주의자들의 무덤 근처에 있는 일리노이 포레스트 홈 묘지에 있는 골드만의 무덤. 출처=위키피디아
헤이마켓 사건으로 처형된 무정부주의자들의 무덤 근처에 있는 일리노이 포레스트 홈 묘지에 있는 골드만의 무덤. 출처=위키피디아

골드만은 베를린의 독일 좌파 공동체와도 갈등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의 탄압에 대해 그녀가 솔직하게 말한 것을 경멸하고 자유주의자들은 그녀의 급진주의를 비웃었다. 1924년 9월 런던으로 이사한 그녀가 러시아에서 혁명 초기에는 원칙이 강했지만, 마르크스주의의 '광신적 국가주의'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라는 개념이 실패를 초래했다고 하면서 소비에트 정부를 비판하자 청중은 충격을 받았다. 뒤에 러셀은 소련의 체계적 변화를 위한 그녀의 노력을 지지하지 않았고 그녀의 아나키즘적적 이상주의를 조롱했다. 추방의 공포 속에서 골드만은 1925년 스코틀랜드 아나키스트인 제임스 콜튼과 결혼했다. 1928년부터 자서전을 쓰기 시작했다.

1936년 버크만이 프랑스에서 자살했다. 1936년 7월, 스페인 내전이 시작되자 골드만은 바르셀로나로 가서 아나키스트 신문의 영어판을 편집했다. 런던에 갔다가 그녀가 "파시스트보다 더 파시스트"라고 부른 영국의 억압적인 분위기에 좌절한 그녀는 1939년에 캐나다로 돌아왔다.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 프랑코를 혐오하듯이 그녀는 영국과 프랑스가 파시즘에 반대할 기회를 놓쳐 다가오는 전쟁이 ‘세상에 새로운 형태의 광기’를 초래할 뿐이라고 느꼈다. 1940년 5월 14일, 그녀는 토론토 에서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녀는 헤이마켓 사건 이후 처형된 사람들의 무덤 근처에 있는 시카고 서부 교외의 일리노이주 포레스트 파크 에 있는 발트하임 공동묘지에 묻혔다. 묘비에는 "자유는 국민에게 내려오지 않을 것이며, 국민은 자유를 위해 스스로를 일으켜야 한다"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