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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학업 사이 사유의 길을 찾아
육아·학업 사이 사유의 길을 찾아
  • 한혜정
  • 승인 2023.07.03 08: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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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
한혜정 이화여대 철학과 박사수료

박사과정을 이행하는 학생들은 저마다 일상의 노곤함을 경험할 것이다. 일상에서 발생하는 자질구레한 고군분투를 학적인 언어와 문제의식으로 ‘승화’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런 심적인 여유조차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대신 지나치게 우울해 보이지 않는 적당한 선에서 학우들에게 털어놓는다거나, 사적인 사정들이 변명이 되지 않게끔 최대한 노력하고, 가끔은 그러한 피로함이 너무 크게 덮치면 소리 없이 사라져서 학교 주변부를 유령처럼 떠돌기도 한다.

박사과정 진학 전, 대부분 학생, 특히 인문학 박사과정생들은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견뎌내야 할 무게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학비는 차치하고서라도, 최소한의 생활을 누리는 데 필요한 아찔한 액수의 생활비와 어쩌면 그보다 더 아찔한 미래의 전망에 수백 번 고민하다 진학을 선택한다. 그런데도 막상 박사과정에 들어서니 내가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압박감이 느껴지곤 했다. 학·석사 시절 존경했던 몇몇 선생님들처럼 재물에 초연한 학자가 되고 싶었으나, 친구들의 작지만 좋은 소식들에, 사소하고 예쁜 물건들에, 멋진 여행지에 쉽게 마음이 흔들리곤 했다. 그 나약함 사이에서 스스로 끊임없이 질문하고, 집요하게 따져 물었다. 자기혐오와 자기반성에 시달리다 어느 순간 지쳐서 ‘그래, 뭐 인생 별거 있겠어, 가볍고 단순하게 살아가자’라며 조금은 무책임하게 마음먹었다. 

그러나 임신과 출산 경험은 또 다른 측면에서 내 의지를 흔들기 시작했다. 나의 매우 사적이고 내밀한 사정으로 변명할 일이 생겼을 때 내가 느낀 비굴함과 부끄러움보다, 이에 대한 누군가의 냉담한 눈초리를 마주했을 때 느낀 두려움보다, 더 힘들었던 것이 있다. 그건 바로 갑자기 세상이 내게 너무 무거워졌다는 것이다. 내가 한 행동이 이 세상에 어떤 결과를 낳아서 다시 아이에게 돌아오게 될지. 마치 세상에 빚을 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이도 어느 순간 내 손에서 점차 떠나보내야 하는 인연이기에 무한한 사랑을 주는 것이 무섭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전에 별생각 없이 보냈던 일상도 무게감이 달랐다. 타인의 생존과 안녕을 위해 내 일상이 얽매여 있게 되었다. 심지어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때도 고생하는 가족들이 있음을 인지하고 있고, 여유 시간에는 각종 병치레로 지친 몸을 회복하는 일이 중요했다. 밖에 나가는 일도 큰 결심이 필요해서 집에서 겨우 마음먹고 앉아 책을 펼치면, 그 안에서 나의 지난 과오와 옛 인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문장과 문장 사이,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과거의 미로 속으로 새어 들어갔다. 논문을 쓰려면 이러저러한 일상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꾸준히 집중하고 몰두해야 하는데, 논문 쓰기와 번잡한 일상 사이 스위치를 딱딱 바꾸려면 이전보다도 훨씬 많은 의지가 필요했다.

매일 반복적으로 나를 소진시키던 일상은 이전보다 더욱 빠르게 흘러가는 기분이었다. 어느덧 연도가 바뀌어 있고, 아이는 자라고, 각종 만기는 다가오고 있었다. 이렇게 착실하게 쌓여가는 일상의 번잡함은 나를 자극해서 어딘가 향하라고 밀어 올리고 있었다. 무언가 부족하고 무언가 필요했다. 아무리 지금 보내는 날들이 만족스럽고 행복해도 말이다. 흘러가는 시간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 깊은 곳에 도사리는 불안함을 해명할 길이 없었다.

현실에서 느끼는 불안함을 불식시키기 위해, 어떤 사람들에게는 현실 외에 항상 다른 세계가 필요한데 나 역시 그랬다. 내게 그 다른 세계는 예술작품이었다. 무탈하게 행복하든, 타인과 관계에서 고민하든, 삶에 회의를 느끼든, 내가 사는 현실을 지탱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나는 항상 무언가를 읽고 보고 들어야했다. 때로 종교적인 안정을 얻으려고 했고, 때로는 같이 울기 위해서, 때로는 오직 아름다움 그 자체에 빠져들기도 하고, 때로는 부질없고 허망한 사건들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했으며, 때로는 타인을 더 이해하고 싶은 호기심에서, 때로는 일상의 괴로움에서 벗어나서 이상향으로 찾아서 들어가듯 도망쳤다. 나는 예술작품과 맺는 관계 속에서 삶을 이해해 갔기에 이를 설명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내게 더 깊은 공간이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다시 학적인 언어를 찾게 되었다. 지금까지 나를 자극하고 성장시켰던 가족들, 친구들, 동기들과 좋은 대화는 생각에 동기를 부여해주지만, 대화 중에 넘쳐흐르는 말과 생각을 정제되고 엄밀한 사유로 풀어내고 싶었다.

일상의 번잡함은 내 시간을 구성하는 가장 큰 부분이기에, 내 과제는 이를 전적으로 부정하지 않으면서 사유의 길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이를 통해 결국에는 내 지각이 더 예민하고 섬세해질 것을 믿고 있다. 

한혜정 이화여대 철학과 박사수료
현재 이화여자대 철학과 박사수료 후 현재 예술 인지주의 논쟁에 대해 박사논문을 준비 중이다. 주요 논문은 「취리히 다다 선언문의 자기비판 정신 - 다다 ‘반예술’의 철학적 의미」(2020)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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