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21:05 (토)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48] "자유와 평등의 실천이 최선의 방어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48] "자유와 평등의 실천이 최선의 방어다"
  • 조준태
  • 승인 2023.07.17 07: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옘마 골드만과 한때는 연인이었고 일생 동안 친구였던 알렉산더 버크만은 골드만과 마찬가지로 지금은 리투아니아가 된 제정 러시아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가난했던 골드만의 집안과는 달리 버크만이 자란 곳은 빌뉴스의 존경받는 유대인 가정이었다. 버크만은 표트르 크로폿킨도 참여한 러시아 혁명단체 ‘차이콥스키’의 창립자이자 혁명적 지도자인 그의 외삼촌 마르크 나탄손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급진주의에 기울어 있었다. 

알렉산더 버크만. 사진=위키피디아

김나지움 시절 니힐리즘 사상을 표현한 이반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을 비롯해 문학 서적을 탐독했는데, 특히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감동했다. 골드만의 독서 경험과도 일치하는데 골드만이 여주인공에게 감동한 반면, 버크만은 남주인공인 라흐메토프에게 반했다. 혁명이라는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개인적인 즐거움과 가족 관계를 기꺼이 희생하는 청교도로 살아가는 그에게 감동한 것이다. 버크만은 직접 쓴 급진적인 소책자를 학교에서 훔친 물품으로 인쇄했으며, 열두 살에 「신은 없다」라는 에세이를 썼다. 열다섯 살 때는 “때 이른 신 부정과 위험한 성향, 반항”을 이유로 1년 낙제라는 벌을 받았으며, 학교 ​​시험지를 훔치고 잡역부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퇴학당했다. ‘니힐리스트 공모자’라는 꼬리표도 붙었다.

1888년, 버크만이 미국에 도착하기 반년 전에 터진 시카고의 헤이마켓 대학살과 그에 따른 탄압으로 인해 그는 즉시 아나키즘 운동에 참여했다. 당시 아나키즘은 주로 이탈리아인과 유대인, 대도시의 러시아 난민 사이에서 이민자 운동으로 전개됐다.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아나키즘 공산주의자였던 버크만과 골드만은 20세기 초, 이민 사회에 등장했다. 1889년부터 연인이 된 그들은 지칠 줄 모르는 운동가였을 뿐만 아니라 최고의 저널을 발간했다. 버크만은 미국에 온 직후, 요한 모스트의 폭력주의에 빠졌으나 1년 뒤 모스트와 결별하고 개인의 자유를 강조한 요제프 포이케르트의 자율주의로 돌아섰다.

 

폭력도 불사한 ‘행동을 통한 선전’

1892년 ‘행동을 통한 선전’의 일환으로, 악명 높은 핑커튼 무장 경비원을 고용해 홈스테드 파업을 방해한 사업가 헨리 클레이 프릭을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22년형을 선고받지만 14년 후 석방됐다. 21세에 투옥돼 35세에 출감된 것이다. 그야말로 청춘을 불사른 감옥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출옥 6년 뒤 그는 첫 저서 『어느 아나키스트의 감옥 경험(Prison Memoirs of an Anarchist)』을 냈다. 회개하지 않은 그는 그 책에 “인간의 생명은 참으로 신성하고 침해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인민의 적인 폭군을 죽이는 것은 결코 생명을 빼앗는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라고 썼다. 그에게는 감옥도 대학이었다. 그는 푸시킨, 고골, 투르게네프, 위고, 졸라를 읽었으며 역사와 시, 철학과 종교 등 광범위한 분야의 독서를 했다.

1892년, 버크만의 프릭 암살 계획을 그린 〈하퍼스 위클리〉의 삽화. 사진=위키피디아

석방 후 그는 1906년부터 1917년까지 〈마더 어스〉를 골드만과 공동으로 발행했다. 이로써 두 사람은 명실공히 아나키스트 운동의 지도자가 됐다. 그는 뉴욕에 페러 학교를 설립했고 교사로 일했다. 실업자 시위와 파업을 이끌었고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반군사주의 운동에 몸을 던졌다. 1916년 〈블라스트(Blast)〉를 창간했고 1917년 새롭게 실시된 징병제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체포돼 재판을 받았다. 재판정에서 스스로를 변호한 버크만은 수정 헌법 제1조를 발동해 정부가 국내에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면서 어떻게 유럽에서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겠다고 주장할 수 있는지 물었다.

“유럽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전하는 당신들은 이곳에 자유가 없다고, 독일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당신이 바로 여기 미국 뉴욕에서 민주주의를 억압한다고 세상에 선포할 수 있는가? 당신들은 이 나라에서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고도 여전히 자유를 너무 사랑해 5천 마일 떨어진 곳에서 자유를 위해 싸우는 척할 건가?”

 

자유, 민주주의 외치는 미국의 민낯을 폭로

그는 2년 동안 투옥된 후 1919년 골드만과 함께 러시아로 추방됐다. 처음에 그는 볼셰비키를 ‘인간 영혼의 가장 근본적인 갈망의 표현’이라고 찬양하고 함께 일했으며 레닌의 논문 「“좌익” 공산주의: 유아 장애」를 번역해달라는 요청도 받았다. 그러나 곧 버크만은 평등과 노동자 권한 부여 대신 억압, 잘못된 관리, 부패를 보고 환멸을 느꼈고 볼셰비키가 혁명을 배반하며 아나키스트를 박해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크론슈타트 봉기를 진압한 것이 최후의 일격이었다. 1921년 7월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희망의 불씨가 하나둘 꺼져갔다. 테러와 독재가 10월에 태어난 생명을 짓밟았다. 혁명의 슬로건은 폐기됐고 그 이상은 인민의 피 속으로 사라졌다. [……] 독재가 민중을 짓밟고 있다. 혁명은 죽었다. 그 영혼은 광야에서 울부짖고 있다 [……] 나는 러시아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버크만은 러시아를 영원히 떠나기로 결정했다.

1922년 베를린에 도착한 버크만은 〈러시아의 비극〉, 〈러시아 혁명과 공산당〉, 〈크론슈타트 반란〉과 같은 팸플릿을 발간했다. 이어 1925년, 러시아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볼셰비키 신화(The Bolshevik Myth)』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같은 해 그는 파리로 거처를 옮겼고 후에는 프랑스 남부에 정착했다. 말년에도 그는 아나키즘 대의에 충실했으며 여러 활동을 했다. 그는 점차 폭력의 효과에 대해 덜 확신하게 됐고 1928년 11월, 골드만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나는 일반적으로 매우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고는 테러 전술을 선호하지 않아.” 

버크만이 쓴 『볼셰비키 신화(The Bolshevik Myth)』. 사진=위키피디아

1929년 버크만이 쓴 『현재와 미래: 공산주의적 아나키즘 입문(Now and After: the ABC of Communist Anarchism)』은 아나코-코뮤니즘에 대한 최고의 입문서 중 하나이자 아나키스트 고전이 됐다. 그 가치는 아이디어의 독창성이 아니라 단순하고 명확한 스타일과 아나키즘에 대한 전통적인 반대에 명쾌하게 대답한 점에 있었다. 그의 사상은 주로 크로폿킨 사상에서 추려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남성과 여성이 더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는 권위주의적 편견을 제거하고 조화와 평화 속에 살 수 있도록 협동과 상호협력의 정신이라는 새로운 생각을 기를 필요가 있다는 그의 기본 신념도 크로폿킨에서 빌려온 것이었다.

 

게으름은 그저 ‘잘못된 장소’에 있다는 뜻

그는 아나키즘의 이상을 ‘힘과 강제가 없이 모든 사람이 평등한 곳, 그리고 자유, 평화, 조화 속에서 살 수 있는 세상’으로 정의했다. 그것은 적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폭탄이나 혼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자유로워야 한다. 아무도 당신을 노예로 삼거나, 당신을 지배하거나, 강탈하거나, 당신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버크만에게 아나키스트 공산주의는 ‘자발적 공산주의, 자유 선택으로부터의 공산주의’를 의미한다. 그의 가장 흥미로운 주장은 「공산주의 아나키즘이 통할 것인가?」라는 장에서 게으름이 ‘잘못된 장소에 있는 올바른 사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 것과 실제로 자유는 다양화를 의미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수단에 관한 한, 그는 아나키스트가 다른 사회 활동가보다 폭력에 독점권을 더 갖지는 않는다고 지적한다. 개별적인 폭력 행위는 이론이라기보다 기질의 표현에 가깝고 ‘무지의 방법, 약자의 무기’다. 사실 「혁명의 방어」에 관한 장에서 버크만은 구체적으로 반혁명의 압력과 테러화를 비난하며 자유와 평등의 실천이 최선의 방어라고 주장했다.

『현재와 미래』가 출판되었을 때 그는 예순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뒤 건강이 나빠졌다. 스페인 아나키스트들이 프랑시스코 프랑코의 우파 반란군에 대항하기로 결정하기 불과 몇 주 전인 1936년에 그는 권총으로 자살했다. 골드만이 그의 마지막 임종을 지켰다. 그녀는 버크만을 헤이마켓 희생자 묘지에 묻고 싶어 했지만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니스 공동묘지에 묻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했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