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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로부터 강제되는 환대…‘길 없음’에서 시작된다
타자로부터 강제되는 환대…‘길 없음’에서 시작된다
  • 이보경
  • 승인 2023.08.25 09: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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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가 말하다_『환대에 대하여』 자크 데리다·안 뒤푸르망텔 지음 | 이보경 옮김 | 필로소픽

‘환대’를 문제화하고 ‘환대’를 실천한 저서
환대에 대한 아포리아적 사유의 의의

이번 번역본은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자크 데리다가 했던 ‘환대’를 주제로 한 세미나 중 1996년 초에 했던 4강과 5강을, 그 세미나에 참여했던 안 뒤푸르망텔이 자신의 글 「초대」와 함께 1997년 출판한 책을 번역한 것이다. 뒤푸르망텔은 왼쪽 지면에 자신의 글을 실어 데리다의 글에 대한 이해를 돕고, 오른쪽 지면에 데리다의 글을 실어 ‘환대’의 주제에 호응했고, 이번 번역본은 이 형식을 그대로 살려 출판했다. 

당시의 세미나는 『환대(Hopitalité)』Ⅰ,Ⅱ로 각각 2021년과 2022년에 쇠이유(SEUIL)에서 출판됐지만, 이 『환대에 대하여』는 현실의 환대 문제를 철학적이면서도 윤리정치적인 문제로 정식화한 데리다의 대표적 저서로 독자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4강과 5강은 환대의 전반적 문제를 치밀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전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미나 전체를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두 글에서 환대의 문제는 플라톤부터 칸트, 하이데거, 레비나스로 이어지는 철학적 환대의 문제로, 모국어의 습득과 번역에 관한 언어적 문제로, 타자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윤리적 문제로, 주권이 이방인과 맺고 있는 법적이고 정치적 문제로, 원격기술의 발전에 의해 가속화된 개인의 사적 영역의 침해 문제 등으로 확장된다. 전문 연구자라면 『환대』 전체를 독해할 필요가 있겠지만 일반 독자라면 『환대에 대하여』를 통해서도 충분히 환대의 문제 전반을 고찰할 수 있을 것이다. 

옮긴이로서 느낀 데리다 환대론의 가장 큰 특징은 단지 ‘길 없음’의 의미를 지닌 고대 그리스어 ‘아포리아’로부터 ‘무조건적 환대와 조건적 환대 사이의 아포리아적 사유가 지닌 힘’을 끌어냈다는 것이다. 1980년대 이후 데리다 사유의 중심축을 이룬 이 주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시각을 제공해 준다. 

첫째, 데리다는 환대에 대해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우리의 자발적 행위가 아니라 타자로부터 우리에게 강제되는 행위라는 것에 주목한다. 그는 이주민이나 난민의 문제가 법적인 차단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듯이 플라톤의 텍스트나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도 항상 이방인이 먼저 물음을 주도했음을 지적한다. 그렇기에 환대 자체를 거부하는 정화적 원한 표출은 자기파괴적인 귀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데리다가 생각하는 환대는 이름도 신원도 모르고 받아들이는 무조건적 환대나, 무조건적 환대에 대한 고려 없이 조건적 환대에 안주하는 것 모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환대의 행위는 매번 두 환대 사이의 아포리아적 경험을 통과해서 수행돼야만 한다. 

둘째, 데리다에게 ‘환대’는 단지 우리가 이주민이나 난민과 맺는 관계만이 아니라 친구와 연인 또는 다른 종과 맺는 관계와 언어나 기술과 맺는 관계가 포함된 인간 생활 전반에 걸친 근본적인 현상이자 행위이다. 그는 인간 생활 전반에 걸쳐 일어나고 있는 환대 현상이나 사건들을 사고의 한계 지점까지 밀어붙이는 아포리아의 경험을 통해 인간과 세계의 장래를 개방할 수 있는 지점을 사유해 보자고 한다. 

어떻게 보면 데리다의 아포리아론은 인간과 세계가 맞이하게 된 위기에 대한 우리의 대처를 촉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는 사례에 대한 분석이나 철학적 성찰에 집중할 뿐 구체적 대처나 일관된 학문적 체계의 제시를 자신의 임무로 여긴 것은 아니다. 이외에도 이 책에서 짧은 지면에 충분히 제시하지 못했지만 깊이 숙고할 만한 가치가 있는 성찰과 사례가 많이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독서는 독자 여러분의 특권이 될 것이다. 

자크 데리다(1930∼2004)는 알제리 출신의 프랑스 철학자이다. 사진=위키피디아

미리 완성한 원고를 세미나나 강의 때 읽어 나가는 데리다의 특성상, 필자는 데리다의 모든 표현들과 전개들이 단지 언어유희가 아니라 숙고된 계산을 거친 것으로 이해하며 번역해 보고자 했다. 더 많은 독자들에게 데리다의 생각을 전달하려면 가독성이 중요하겠지만, 철학적 용어나 논리 전개를 흐리게 번역하지 않아야 했다.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놓아야 했지만, 역자로서 이해한 하나의 해석을 확정해야 했다. 그 과정은 필자의 일천한 외국어 실력을 실감하는 고통의 시간이자 발견의 기쁨도 느끼는 시간이었다.

남수인 전 상명대 교수(불어교육)의 이전 번역본을 포함하여 각 개념에 상응하는 한글 번역어가 번역자마다 다른 경우가 꽤 되었는데, 막상 필자도 거기에 또 하나의 다른 한글 번역어를 보탤 때가 많았다. 고쳐야 할 오역들이 또 발견되겠지만 이전의 번역보다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갔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필자의 번역 역시 환대의 실천이자 환대의 아포리아를 경험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독자 여러분들도 이 국역본을 읽어 나가면서 같은 경험을 공유한다면 번역자로서 더 없는 영광일 것이다.

 

 

 

이보경 
독립연구자
서울대 인문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샹탈 무페의 『정치적인 것의 귀환』을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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