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16:55 (토)
한국·동남아 삼켰던 일본…인식과 담론은 왜 달랐나?
한국·동남아 삼켰던 일본…인식과 담론은 왜 달랐나?
  • 이형식
  • 승인 2023.08.30 11: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평_『동남아시아로부터 본 근현대 일본』 고토 겐이치 지음 | 라경수 옮김 | 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 | 408쪽

일본의 동남아 점령·지배 둘러싼 역사 인식 문제
해방·자위전쟁과 독립 공헌 사관 정면에서 비판

한국의 동남아시아 연구는 너무나 빈약하다. 특히 3년 반에 걸친 일본 점령 시기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동남아시아라고 하는 분야는 사회과학 이론의 산실이 돼왔다. 문화인류학자 클리퍼드 기어츠나 정치학자인 베네딕트 앤더슨과 같은 세계적인 학자가 인도네시아를 연구 대상으로 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다종교·다언어·다민족·다문화 사회가 가지는 복잡하고 특수한 상황이 새로운 이론을 탄생시켰다. 

동남아시아에서도 가장 많은 인구와 가장 큰 영토를 소유하고 있는 인도네시아의 역사와 사회는 복잡하고 다양하다. 네덜란드와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 전후 제3세계의 반식민지주의의 기수가 되었지만, 1975년 동티모르를 침략해 민족자결권의 폭력적인 억압자로 변신했다. 저자도 지적하고 있듯이 네덜란드·일본·포르투갈(동티모르의 종주국)·동티모르를 둘러싼 국제 환경이 복잡하게 뒤얽히면서 걸어온 20세기 인도네시아의 발자취는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클 것이다. 

저자 고토 겐이치(後藤乾一) 와세다 명예교수는 일본의 정치학자이자 역사학자이다. 와세다대를 졸업하고 코넬대를 거쳐 게이오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코넬대에서는 막 박사학위를 취득한 베네딕트 앤더슨에게서 배웠다. 올해 팔순이지만 아직도 왕성하게 저술 활동을 하고 있는 일본·동남아시아관계사와 동남아시아근현대사(인도네시아사)의 세계적인 권위자이다. 일본 전후 70년에 즈음해 무라야마 담화와 고노 담화를 수정하려는 ‘아베담화’에 반대해 성명을 발표하기도 한 진보적인 학자이다. 

이 책은 주로 1990년대 이후 저자가 쓴 학술 논문을 모아서 2012년, 정년퇴직을 한 해 앞두고  출판한 것이다. 발표된 지 이미 20년이 지난 논문도 있지만 풍부한 1차 사료와 영어·일본어·네덜란드어·인도네시아어 2차 문헌을 면밀히 분석했기에 학문적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다. 제1부에서는 러일전쟁 이후 1990년대까지의 일본·동남아 관계를 개괄하면서 도조 내각 시기의 인도네시아와의 관계와 탈식민지화를 둘러싼 동남아시아 지역질서 구상을 거시적으로 검토했다. 

제2부에서는 다양한 입장하에서 ‘대동아공영권’ 아래 인도네시아 점령과 통치에 관여했던 개인에 초점을 맞추어 일본과 동남아시아의 관계를 미시사적인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다. 제3부에서는 동남아시아를 둘러싼 역사인식문제를 다뤘다. ‘전후 50년’을 계기로 부상한 ‘해방전쟁’ 사관, ‘자위(自衛)전쟁’ 사관, ‘독립공헌’ 사관을 정면에서 비판하고 언론에 표상된 일본인들의 동남아시아상(像)을 밝혔다. 특히 역사수정주의가 맹위를 떨치고 있는 일본 사회에서 역사인식문제는 ‘전후 80년’(2025년)을 앞두고 다시 재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연구테마다.  

이 책에서는 일본의 한국 식민지 지배와 동남아 점령과 지배를 둘러싼 인식과 담론이 사뭇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이 담고 있는 일본의 동남아 점령과 지배를 둘러싼 역사 인식의 문제, 탈식민지화의 문제, 기억의 문제는 한국학계가 참조하고 비교해야 할 중요한 대상이 될 것이다. 나아가 일본의 동남아 점령과 지배가 일본의 한국 통치에 미친 영향과 충격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는 이제 앞으로 한국 학계가 대답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일본 근현대사와 동남아시아사에 대한 배경지식이 적은 독자에게는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일본의 동남아점령과 동남아의 탈식민지화에 대해 접할 수 있는 한국어 문헌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 학술서가 시대를 너무 앞서간 게 아닌가 조금 걱정이 된다. 다행히 번역자인 라경수 가쿠슈인여자대 교수(국제문화교류학부)가 고토 명예교수가 최근에 쓴 일본 점령기의 동남아시아에 대해서 쓴 대중용 통사(『일본의 남진과 대동아공영권(日本の南進と大東亜共栄圏)』, めこん, 2022)를 번역한다고 한다. 가뭄에 내리는 단비와 같은 반가운 소식이다. 동남아시아사뿐 아니라 식민지연구, 아시아태평양전쟁, 역사인식 문제, 탈식민지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독자에게 일독을 권한다. 

 

 

 

이형식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 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