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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삶·학문을 일치시킨 별난 영성가, 길희성
신앙·삶·학문을 일치시킨 별난 영성가, 길희성
  • 정대현
  • 승인 2023.09.18 08: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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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길희성(1943.5.6.~2023.9.8.) 서강대 종교학과 교수 추모사_ 정대현 이화여대 명예교수·철학과

 

고 길희성 교수

길희성 선생님,
생사고비를 몇 차례 넘나들더니, 결국 가셨군요. 박남미 사모님과 두 따님, 재은 씨와 영은 씨를 뒤에 두고 그 고비를 넘기가 어려우셨지요?

선생님과 저의 친밀한 교류는 40년이 넘었네요. 그 기간 동안 공유했던 주제들도 참 다양했습니다. 철학, 기독교, 불교, 새길교회, 비트겐슈타인, 포스트모더니즘, 음악과 미술, 역사와 정치, 태국의 수코타이와 나고야 대학 여행 등 인간 삶의 거의 모든 국면들이 우리 대화의 소재였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대화들은 단편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을 보내는 이 자리에서는 제가 이해하게 된 선생님의 세계관을 짧지만 체계적으로 요약하여 선생님의 성취에 감사하고 그 삶을 추모하고자 합니다.

선생님은 외면적으로 저서를 15권 넘게 내는 출판 중심의 모범 학자이지만, 내면으론 어려서부터 물었던 신앙의 물음에 대해서 끝없이 추적하고 정직하게 당면하고 외롭게 씨름해 왔던 별난 학자였습니다. 신앙과 삶과 학문을 통합한 이 시대의 특이한 존재였습니다. 

선생님은 평생 물었던 그 많은 물음들을 결국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환원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예수의 정체성을 확인합니다. “사람 예수가 하나님이 되었다” 또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라는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 설화에서 예수의 정체성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神人合一을 믿는다는 것이고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예수처럼 “나도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 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라는 가능성에서 神人合一의 “기쁜 소식”의 내용과 “예수 믿음”의 총체성이라는 것을 본 것입니다. 늘 강조해 온 것처럼, “예수에 대한 신앙”이 아니라 “예수의 신앙”입니다.

선생님의 이러한 성서 해석은 한편으로 평범해보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과격합니다. 예수의 神人合一적 성육신을 기독교의 수 많은 교리들 중의 하나로 간주할 때 산수적인 평준화에서 오는 평범성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선생님처럼 인간 예수의 神人合一적 성육신을 기독교의 유일한 배타적인 교리로 선택할 때 그 과격성이 돋보입니다. 선생님의 그러한 성서 해석은 무엇에 근거한 것일까요? 선생님의 비교종교학이 아닐까요?

선생님은 선불교의 임제선사, 가톨릭 수도사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동학도 최시형은 모두 神人合一, 우주와의 합일을 제시하고 수행한 영적인 모델로 선택했습니다. 그렇다면 성서의 성육신 텍스트는 그렇게 과격하게 해석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지요?

성서의 성육신 텍스트에 대한 선생님의 해석이 한편으로 과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연스럽다는 것은 어찌된 까닭일까요? 선생님 해석이 과격하다는 것은 “기존의 기독교” 프레임에서 벗어났다는 것이고 자연스럽다는 것은 “원초적 기독교” 프레임에 맞다는 것이 아닐까요? 기존 기독교 프레임은 히포 공의회 (393년)등에 의해 27권의 신약성서가 확정되고 제1차 공의회(니케아 324년)~제8차 공의회(콘스탄티노플 870년)에서 삼위일체, 교황제도 등의 교리를 만들어 기독교의 외양적 지속가능성을 확립하였지만 선생님은 기독교의 교리 제도적 구조에서 탈피하고자 한 것입니다.

선생님이 그 해석으로 원초적 기독교에 다가간다는 것은 사도행전의 오순절 사건에서 보이듯 예수는 메시지화 되고 성령 강림의 기독교를 추구하는 것이지요? 선생님은 제도적 기성교회가 아니라 비제도적이고 영성이 지배하는 퀘이커, 무교회, 씨알 사상에 친근감을 표명해 왔습니다. 이들 모두 원초적 기독교를 지향하는 양식으로 보입니다.

고 길희성(1943.5.6.~2023.9.8.) 서강대 명예교수가 지난 8일 향년 8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선생님은 神人合一이라는 기쁜 소식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새길교회를 떠나 심도학사를 세웠습니다. “아직도 교회 다니십니까”라는 책은 그러한 선생님의 마음을 정직하게 보이는 神人合一의 염원을 담은 것입니다. 다른 종교의 영성에 더욱 개방적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선생님의 “예수 믿음”은 이제 종교 간의 벽을 해체하는 방법론적 열쇠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선생님은 神人合一을 위해서는 심도학사 자체도 해체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그 개원식에서 선언했습니다. 선생님의 이러한 선언은 神人合一의 이중적 구조 때문에 불가피했습니다. “神人合一은 이미 이루어졌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라는 이중성입니다. 인간은 개인이지만 또한 공동체의 성원입니다. 공동체의 벽은 개인을 보호하는 면도 갖지만 또한 개인을 억압하는 국면도 결과합니다. 공동체는 지속가능해야 하지만 또한 神人合一의 장애일 수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예수 믿음”은 양자물리학의 한 해석과도 일관됩니다. 神人合一의 이중적 구조 때문에 선생님의 “예수 믿음”은 국면적 神人合一이고 국면적 우주합일일 것입니다. 양자물리학의 한 해석은 “우리와 세계는 근본적으로 하나(the one)다”라는 명제에 긍정적입니다.

양자물리학의 철학자 네이(A. Ney)는 그러한 명제를 조명하는 방편으로 “우리와 세계라는 거시적 대상들은 미시적 파동함수로부터 구성되었다”라는 가설을  제안 합니다. 이러한 가설을 수긍할 수 있으면 선생님의 神人合一이나 우주합일론은 힘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역설적이게도 선생님의 “예수 믿음”은 뉴턴-칸트 형이상학의 확실성의 이분법적 이원론보다는 양자물리학의 불확실성의 융합적 일원론에 가까운 것입니다.

선생님은 神人合一의 이중성 속에서도 새길교회나 심도학사의 지속가능성을 기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위독하여 입원했을 때 가졌던 영상 통화를 기억합니다. 여러 이야기를 하다가 추응식 교수의 소천 소식에 아파하며 우셨습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된 사람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원초적 기독인은 선생님의 신앙고백대로, 예수 따르미가 되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연결되었습니다.

선생님은 그러한 원초적 기독인은 기독교라는 울타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종교적 프레임도 넘어 설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 휴머니스트가 되는 것입니다. 소립자가 비지칭적이듯 인간 일상언어는 비지칭적이지만 사용적이고 상징적이기만 하여 그 만큼 자유로워 지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제 하나님과 하나 된자, 우주와 합일된 누구와도 같은 마음으로 아파 울거나 기뻐 웃을 수 있는 것입니다.

길희성 선생님, 선생님은 그 많은 물음들을 예수 믿음, 예수 따르미라는 개념으로 조명했습니다. 그리고 불완전하지만 이미 이루어진 神人合一의 감격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람 예수가 하나님과 하나 된 것처럼, 선생님은 이제 하나님과 하나 되셨습니다. 선생님의 젊은 시절의 신앙의 물음들에 대한 탐구가 선생님의 마지막 저서 “영적 휴머니즘”에서 체계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선생님이 달려갈 길을 마치면서 또한 우리들에게 그 여정의 과정의 정직함과 아름다움과 기쁨을 보여주셨습니다. 선생님은 하나님과 하나 됨으로 안식에 도달하셨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편히 쉬소서. 

정대현 이화여대 명예교수·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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