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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평가는 공정성의 함정
상대평가는 공정성의 함정
  • 안상준
  • 승인 2023.11.06 09: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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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정론_ 안상준 논설위원 / 국립안동대 사학과 교수

 

안상준 논설위원

교육 덕분에 선진국으로 성장했지만 교육 때문에 국민의 삶이 선진국답지 않게 팍팍해진 나라, 대한민국. 지구상에 7개국밖에 없다는 이른바 30-50클럽에 속하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지만 교육제도 특히 대학입학시험은 여전히 개발도상국 시절의 제도와 인식에 머물러 있다. 

한국 사회에서 학벌은 곧 신분이다. 학벌은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으로 결정되고, 수능 성적에 따라 일생이 좌우된다는 믿음이 한국인의 의식을 지배한다. 따라서 수능의 방향에 따라 교육과정이 결정되는 기이한 상황이 벌어지고, 전국의 모든 가정은 수능 준비의 전초기지로서 가용 자원을 모두 쏟아붓는다.

수능은 원래 사고력과 문제해결 능력, 응용력 등 종합적 사고능력을 측정해 대학에서 수학할 수 있는지를 평가하자는 취지로 도입된 시험이다. 참신한 취지에도 불구하고 수능에는 두 가지 근원적인 결함이 내재한다. 하나는 5지선다형 객관식 시험 형식이고, 다른 하나는 기형적 상대평가이다. 

애당초 객관식 시험으로 사고력과 응용력을 측정하겠다는 발상은 모순적이다. 인간의 기본적인 능력은 듣고 말하고 읽고 생각하고 표현하는 능력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학생 개개인의 잠재력과 실제적인 사고능력의 측정을 외면한 객관식 시험이 이제 한계에 부딪쳤다. AI·챗봇의 등장은 결정적이다. 

상대평가에서는 지식의 습득, 학업 성취도, 학습 만족도 등 교육적 가치는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중요한 건 ‘앞에 서기’다. 무한경쟁이 이루어지는 배경이다. 입시 지옥이 펼쳐지고 여기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가용한 자원을 모두 쏟아부어야 한다. 당연히 곳곳에서 원성이 터져 나온다. 26조 원이 넘는 2022학년도 초중고 사교육비 총액, 학생 1인당 41만 원이지만 웬만한 가정에서는 사교육비로 수백만 원을 지출하기 일쑤다. 게다가 95조 원이 넘는 교육예산을 감안하면 각 가정이 부담하는 교육비는 상상을 넘는다. 

그러나 선진국에서는 볼 수 없는 입시 지옥을 학부모들이 앞장서서 외친다. ‘수능 상대평가는 공정한 선발의 기본’이라고. 수능 개편안이 발표되자 학부모 시위대가 내건 구호이다. 가용한 재원이 충분하여 입시 지옥에서 학벌을 쟁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로 보인다. ‘공정한 선발’로 위장한 시장의 승리가 엿보인다.

이 지옥에서 교원의 역할은 줄세우기에 한정된다. 상대평가에서 교원은 학생의 능력·재능·발달과정을 주체적으로 평가할 근거를 상실한다. 학생들과 함께 김소월의 ‘산유화’를 읽고 음미하기보다 시에 담긴 의미와 은유를 분석하고 정답을 찾기에 몰두한다.

“논·서술형 도입의 걸림돌은 사교육이다. 한국 학생들에게 논·서술형은 객관식보다 어렵게 느껴지고, 더 많은 ‘개별 지도’를 요구한다. 따라서 논·서술형 시행은 사교육업계에 대형 호재다.” 모 교육평론가의 최근 칼럼의 일부 내용이다. 교원의 역할을 원천적으로 부정한다. 그리고 우리 학교 교육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상대평가로 말미암아 교원은 교육을 주도하고 학생을 평가할 권위를 잃었다. 애당초 없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교육의 비극, 우리 교원의 비극은 여기서 시작된다. 선진국의 민주화와 산업화를 따라잡아 실현하였지만, 교육제도는 선진국형을 외면하는 대한민국의 미래는 과연 우려하지 않아도 좋을까? 

전 국민이 교육전문가를 자처하는 대한민국에서 역설적으로 모두가 불만과 불행을 토로한다. 입시 지옥과 무한 경쟁에 시달리는 학생, 교권의 추락으로 실의에 빠진 선생님, 벼랑 끝으로 밀리지 않으려고 아둥바둥 버티겠다는 학부모. 이 비교육적이고 반교육적인 제도와 상황을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하지만 비바람이 몰아칠 때 담뱃불을 붙이는 방법이나 젖은 장작에 불을 붙이는 방법을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었다. (중략) 그런데도 거기서 주입식 교육을 받는다면 아무 소용없을지도 모르지.”(『서부전선 이상 없다』에서) 1917년 죽음이 드리운 참호 속에서도 학교 교육에 대한 병사들의 질타가 뼈를 때리는 아픔으로 다가온다.

안상준 논설위원
국립안동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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