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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인류세를 어떻게 논의하는가
철학은 인류세를 어떻게 논의하는가
  • 최승현
  • 승인 2023.11.09 09: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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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가 말하다_『인간 이후의 철학』 시노하라 마사타케 지음 | 최승현 옮김 | 이비 | 356쪽

비인간에 대한 적극적 상상과 인간중심주의 비판
인류세는 현실의 차별을 지워 기업의 이익에 종속

오늘날 인류세를 둘러싼 철학적 담론은 뜨겁다. 그만큼 기후 위기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진 탓이다. 우선 비인간에 대한 적극적 상상을 통해 인간중심주의를 최전선에서 비판하는 미국의 생태철학자 티모시 모튼(1968~ )이 있다. 그는 인간 아닌 장소와 인간이 쓰지 않는 땅, 그리고 거기에 존재하는 동식물과 사물을 상상해 보자고 제안한다. 『생태적 삶』(김태한 옮김 | 앨피)은 그런 사유가 고스란히 담긴 대표적 대중서이다. 

한편으로 사회구조적 차별에 주목하여 탈성장을 주장하는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원제 人新世資本論 | 김영현 옮김 | 다다서재)의 저자 사이토 고헤이(1987~ )가 있다. 그는 인류세 담론이 현실의 차별을 지워 결국 기업의 이익에 종속될 것이라고 비판한다. 지속가능한 개발이나 ESG 경영과 같은 말이 허구임을 강조한다. ‘코로나19’ 이후 사람들은 혼자 사는 환경에 익숙해졌다. 

두 철학자는 공히 인류세와 나란히 등장한 디지털 사회가 상품의 소비 주기를 훨씬 더 빠르게 바꿔놓았다는 점에 주목한다. 특히 모튼은 앰비언트 음악과 시학을 통해 소비주의의 허상을 꼬집는다. 나아가 고헤이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라는 마르크스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협동조합 운동을 갱신하고자 한다. 

『인간 이후의 철학』은 모튼과 동시대 철학자의 계보를 좇는다. 달 착륙에 성공한 1966년을 기점으로 인류를 과거와 미래로 나눈 한나 아렌트(1906~1975), 우리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사물의 심층적 세계에 주목한 그레이엄 하먼(1968~ ), 의미장 없는 세계를 거부함으로써 다원주의를 옹호하는 마르쿠스 가브리엘(1980~ ), ‘인간적 척도를 벗어난’, ‘행성 규모의’라는 표현을 전면화한 디페시 차크라바르티(1948~ )와 같은 사상가들을 인류세의 철학적 장으로 끌어들인다. 

역자에게 이 책의 매력은 무엇보다 자신이 사는 곳의 철학자와 예술가를 적극적으로 사유하는 점에 있다. 요네다 도모코(1965~ )는 「지진 재해 이후 10년」이라는 사진전에서 1995년 한신·아와지 대지진 십 년 뒤의 고베 거리를 단순한 폐허로 묘사하지 않는다. 인간이 떠났어도 경쾌하게 날아다니는 갈매기들, 우리가 보기에는 잡초에 불과한 마당 앞의 무성한 풀들을 보여준다. 

개인과 군중의 경계가 모호한 도시를 비추는가 하면 사물이 놓인 공간을 흐릿하게 제시한다. 한편 2019년 오카다 도시키가 이끄는 극단 ‘첼피쉬’는 「고무지우개 산」이라는 작품에서 배우들은 실제로는 없는 소파를 상상하며 이야기를 부풀려 가는 실험적 연극을 선보인다. 사물의 에너지로부터 끌어낸 이야기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을 번역하면서 나는 하마구치 류스케(1978~ )의 영화를 떠올렸다. 「드라이브 마이카」(2021)에서 작가와 운전기사로 만난 두 주인공은 각각 삶의 아픔을 가지고 있다. 작가는 아내의 자살로, 운전기사는 쓰나미로 인한 원전 폭발로 고향에서 쫓겨 나왔다. 결국 둘은 폐허가 된 운전기사의 고향으로 향한다. 

「드라이브 마이카」(2021)의 포스터.

집이 사라진 곳에서 서로를 끌어안으며 위로하는 장면은 마치 삶의 고통을 겪는 모든 이들을 위로하는 것 같다. 「해피 아워」(2015)에서는 평범해 보이는 30대 여성 네 명이 여행을 떠난다. 5시간 17분에 이르는 이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무난하게 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래 알고 지낸 친구의 속 깊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너져가는 자신을 만나고, 서로를 보듬는다. 

그의 영화는 실존의 취약함과 인간성에 대한 믿음을 문학작품처럼 펼쳐 보인다. 추천사를 쓴 진태원 성공회대 민주화자료관 연구교수는 “붕괴의 상상력, 사물적 유령론, 촉각의 언어를 통해 세계를 사유하는 이 책은 첨예한 논란을 촉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문학 또한 철학적 가치가 있다”라고 평했다. 이 말의 의미를 확인하고 싶은 독자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최승현 
충북대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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