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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64] 위계와 지배 대신 새로운 ‘생태적 감수성’을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64] 위계와 지배 대신 새로운 ‘생태적 감수성’을
  • 박홍규
  • 승인 2023.11.13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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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친③ 생태적 위기의 극복을 위한 사회생태학

북친에 의하면 과거에는 희소성을 극복하기 위해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자연을 지배한다는 개념 자체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의 여성 지배와 ​​위계적 사회에서 남성의 남성 지배에서 처음 등장했다. 그리고 지금 인간과 자연은 모두 생태적 멸종에 직면할 정도로 지배가 일상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를 노예화하고 환경을 파괴한 기술은 또한 자유의 전제 조건을 제공할 수 있다. 단 그것은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때에만 가능하다. 마르크스가 사회주의와 야만 사이의 선택을 제시한 반면, 북친은 아나키즘과 전멸 사이의 선택에 직면해 있다고 주장한다. 인류가 미래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자유롭고 생태학적인 사회를 창조함으로써만 가능하다. 

머리 북친

사회 생태학, 북친의 혁명적 생태론과 아나키즘의 결합

생태학은 생물과 무생물의 상호 의존성과 함께 자연의 역동적인 균형을 다룬다. 생태학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생태계의 전반적인 조화가 다양성에서 가장 잘 실현된다는 점이다.

반면에 인류는 고도로 복잡한 유기 환경을 단순화된 무기 환경으로 대체함으로써 유기적 진화 를 없애고 있다. 생태학의 중요한 메시지는 우리가 자연 세계의 다양성을 감소시키면 그 단일성과 전체성을 저하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자연 세계의 통일성과 안정을 증진시키려면 다양성을 보존하고 증진해야 한다. 생태적 전체성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분화에 의해 균형과 조화가 달성되는 다양성의 역동적인 통일체다. 

자연 질서에서 사회적 영역으로 옮기면서, 북친은 생태적 관점에서의 자연과 사회, 그리고 추론에 의한 행동의 균형과 조화는 기계적 표준화가 아니라 그 반대인 유기적 분화에 의해 달성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아나키즘이 생태적 원리를 실현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처럼 생태학도 아나키즘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 북친에 의하면 아나키즘은 생태계에 대한 그의 설명, 즉 모든 위계와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다양성, 자발성, 상호보완적 관계의 통합 이미지에 따라 정의된다. 

그것은 비위계적 틀에서 참여와 차별화라는 두 가지 기본 도덕 원칙을 제공한다. 아나키즘은 과학적으로 입증되고 위협적인 생태적 멸종에 대한 유일한 대안으로 제시된다. 북친은 그의 혁명적 생태론과 아나키즘의 결합을 ‘사회 생태학’이라고 부른다.

북친에게 급진적 사회생태학의 근본 개념은 계층과 지배다. 사회생태학은 다양성, 자발성 및 보완성의 통합이라는 생태학적 원칙에 영감을 받아 생물권의 균형과 무결성을 그 자체로 목적으로 본다. 그것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변화시키고, 자연과 그 안에서 우리의 위치를 보는 방식을 변화시키는 운동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환경주의, 심층생태학과는 다른 사회생태학 

북친은 자연을 객체로 구성된 수동적 서식지(passive habitat)로 보고 주로 보존 및 오염 제어와 관련되는 환경주의와 사회생태학을 구별한다. 환경주의는 지배와 위계에 기초한 사회의 기본적인 전제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북친은 또한 아르네 네스(Arne Naess) 등의 소위 ‘심층 생태학’(Deep Ecology)과의 차이점을 강조하며, 심층 생태학은 생태 문제가 궁극적으로 사회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북친은 자신이 ‘에코토피아’라고 부르는 생태적이고 아나키즘적인 사회의 청사진을 그리는 것을 거부하지만, 몇 가지 기본적인 고려 사항을 제공한다.

첫째, 사회혁명뿐 아니라 ‘정신의 개조’를 포함하는 문화혁명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위계적이고 지배적인 사고방식 대신에, 전체론적 관점을 갖고 ‘유희, 환상, 상상’을 찬양하는 새로운 ‘생태적 감수성’이 개발되어야 한다.

그러한 감수성은 인간의 의식에서 ‘자기의식과 자기활동이 된 자연 세계’를 봄으로써 자연 세계의 ‘재기동화’로 이끄는 ‘새로운 애니미즘’과 동반되어야 한다. 더욱이 ‘애니미즘적 상상력’은 사물의 ‘방법’과 ‘이유’를 분리하지 않는다. 

자연을 감성의 범주 안으로 끌어들이다 

둘째, ‘자유 사회’에서는 이성에 대한 아나키즘적 접근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북친은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처럼 우주를 합리적이고 의미 있는 질서로 만드는 ‘객관적’ 이성을 믿지만, 목적을 수단으로 바꾸는 도구적 이성을 비판한다.

‘자연을 감성의 범주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합리성과 주관성을 통합하는 것’을 넘어서기 위해  제1 자연 세계와 제2 자연 세계, 즉 자연적 세계와 사회적 세계, 생물학적 존재와 합리성 사이의 지속을 회복해야 한다.  

북친은 자신의 ‘에코토피아’가 자치 공동체의 연합으로 구성될 것이라고 제안한다. 각 코뮌은 직접 민주주의를 통해 스스로 다스린다. 그리스의 폴리스처럼 대표나 위임된 권한이 없는 대면 민주주의다. 행정 업무는 순환될 수 있지만 근본적인 정책은 모두에게 열려 있는 대중 집회에서 만들어진다.

시민이 사회적 과정을 직접 통제한다는 의미에서 사회는 정치체다. 이러한 직접 민주주의는 직접 행동의 가장 진보된 형태를 제공하며, ‘자기 관리’의 강조점은 ‘자아’에 있다. 

북친의 자유 사회, 어떤 계약도 체결되지 않는다

경제적 영역에서 북친의 ‘에코토피아’는 사유재산의 폐지, 개인의 필요에 따른 재화의 분배, 상품관계의 해체, 노동의 순환, 노동시간 단축을 전제로 하는 ‘아나코-코뮤니즘’을 실천하는 것이다. 교환가치와 등가의 법칙에 기초한 낡은 정의관은 불평등의 평등을 인정하는 자유의 이상으로 대체된다. 대중에게 고뇌였던 필요는 개인의 쾌락인 욕망에 자리를 내어준다.

그리고 필요는 더 이상 희소성이나 관습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의식적인 선택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분배는 용익, 보완성 및 환원 불가능한 최소값에 기초한다. 북친에 따르면 용익권은 ‘필요에 따라 각자에게’라는 공산주의 격언보다 더 관대한 원칙이기 때문에 그것은 19세기 아나키즘의 발전이다. 그것은 법 없이 관계를 규제하는 계약에 대한 프루동의 호소를 넘어선다.

아무리 자유롭게 체결되더라도 계약은 필연적으로 ‘부르주아적 권리 개념에서 정점에 도달하는 평등 체계’인 등가 개념에 기초한다. 모든 계약은 잠재된 적대감을 반영하며 배려와 보완성에 대한 이해를 결여한다.

따라서 북친의 자유 사회에서는 어떠한 계약도 체결되지 않는다. 모두가 최소한의 생활비를 받고 대가를 고려하지 않고 자유롭게 기부한다. 시장 경제는 사람들이 서로 관계를 맺는 방식을 바꾸는 ‘도덕 경제’로 변모한다. 책임과 의무를 요구하는 것이 새로운 슬로건이 된다. 

에코코뮌의 생태계

북친은 자신이 연합한 코뮌 사회의 기본 단위를 에코코뮌(ecocommunities)이라고 부른다. 지역 생태계에 맞게 조정되면 소규모 농업과 산업이 균형 있게 혼합된 지역 또는 지역적 자급자족 상태에 가까워진다. 해방 기술은 또한 분산되어 민주적 통제를 받고 생태적 가치와 양립할 수 있다.

북친에게 작다는 것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생태학적, 휴머니즘적이며 무엇보다 해방적이다. 그것들은 ‘자연 예술’을 ‘인공 공예’로 복원하려고 노력한다. 무엇보다도 그것들은 생태계, 생물 지역 및 생물 군계와 조화를 이루는 연합을 형성한다. 

북친은 그것들이 자연 환경에 예술적으로 맞춰진 것을 상상한다. 즉 우리는 그것들의 광장이 시냇물에 의해 얽혀 있고, 집회 장소가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물리적 윤곽이 존중되고 세련되게 조경되고, 그들의 토양이 우리 자신과 우리의 가축, 그리고 가능한 한 주변에서 지원할 수 있는 야생 동물로 둘러싸인 것을 상상한다.

지역 사회는 최소한의 오염으로 지역 재료와 에너지원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생태계의 다양성을 선호하고 의식적으로 생물권의 무결성을 촉진하는 유연하고 다재다능한 기계를 사용하여 ‘생태 기술’을 개발한다. 

그는 객관적인 사회적 힘의 체계로서의 기술과 조직의 체계이자 앎의 방식인 기술적 합리성을 구별한다. 공예 작업장이 아닌 공장에서 예시되는 권위주의적 기술과 자유주의적 기술이 있을 수 있다.

북친은 기술의 그리스 개념에서와 같이 윤리적 차원을 인정하고 각 형식을 유기적 전체의 일부로 보는 해방적 기술을 옹호한다. 그것은 물질을 원자의 죽은 집합체가 아니라 ‘의미 있는 패턴’을 발전시키는 ‘활성 물질’로 간주하는 기술적 상상력을 개발하는 것을 포함한다.

해방 기술은 또한 분산되어 민주적 통제를 받고 생태적 가치와 양립할 수 있다. 그것은 작고 적절하며 휴먼스케일과 연결되지만 무엇보다 새로운 문화에 뿌리를 두고 새로운 의미와 디자인을 발전시킬 것이다. 

둥글고 완전한 인간과 사회생활

북친의 생태커뮤니티는 마을과 나라, 노동과 놀이, 정신과 신체, 개인과 사회, 인간과 자연 이의 현존하는 갈등을 극복한다. 그것은 둥글고 완전한 인간과 사회생활이라는 그리스적 이상을 실현할 것이며 ‘잘 균형 잡힌, 조화로운 전체’로 바꿀 것이다. 그러한 사회는 과거로부터의 자유의 유산, 특히 전통적 사회가 용익권, 보완성, 불평등의 평등 및 환원 불가능한 최소값에 대한 헌신을 이어받는다. 

그것은 사유재산, 계약의 신성함, 등가 규칙 준수에 대한 기존 계급 사회의 주장을 넘어선다. 그것은 또한 초기 유기적 사회가 향유했던 강력한 공동체적 결속을 잃지 않으면서 보편적 인간성에 대한 르네상스적 감각과 개인의 자율성에 대한 현대적 강조를 발전시킨다. 

무엇보다 상호의존과 상호부조로 지배와 위계를 대체할 것이다. 자유롭고 생태적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북친은 혁명의 목표에서 그 과정을 분리하는 것을 거부한다. 아나키즘적 수단만이 자유주의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따라서 혁명은 권력 장악이 아니라 권력의 해체를 목표로 해야 한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했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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