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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의 총탄에 미국은 얼마나 개입했을까
김재규의 총탄에 미국은 얼마나 개입했을까
  • 이완범
  • 승인 2023.11.24 10: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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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말하다_『미국의 한국 정치 개입사 연구: 박정희 제거 공작 편 1·2·3』 이완범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 1,516쪽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한 10·26사태 배후의 문헌 연구
자주파 박정희 대 동맹파 김재규, 그리고 미국의 공작

박정희 정부의 극적인 몰락 과정의 중심에 있던 10·26사태의 배후에 미국의 영향력이 숨어 있다는 소문은 사건 직후부터 나왔다. 그러나 4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도 증거 부족 등을 이유로 본격 해명되지 못했으므로 이를 연구하기로 했다. 

문헌 연구자인 필자는 우선 관련 문헌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물증을 찾기는 대단히 어려웠다. 관련국인 미국의 당사자가 자신들이 자행한 비밀공작의 증거를 남기는 어리석은 짓을 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설사 흔적을 남겼다고 해도 공개할 리는 더욱 만무했다. 

또한 당사자인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은 이미 1980년 5월에 사형됐으므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혹자는 1979년 10월 26일 오후 2시에 당시 주한미국 대사였던 글라이스틴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만났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3권: 491쪽). 이에 관련 문서를 뒤져보고 미국 문서고에 비밀 해제도 청원했으나 역시 확실한 물증은 나오지 않았다.

따라서 구술자료와 신문기사 등의 2차 자료와 간접 증거를 수집하는 데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객관적 사료에 드러나지 않는 은폐된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비판적 해석과 방증을 통한 추론도 병행했다. 물론 추정은 재판과정에서 확정적인 증거로 채택되기 어렵지만, 추론은 사실을 재구성할 수 있는 유용한 수단이다.

김재규와 미국의 공모설이 대한민국에서 계속 제기되자 글라이스틴 주한미국 대사는 1979년 11월 19일 밴스 미 국무장관에게 전문을 보냈다. 자신이 CIA 한국지부장 브루스터와 함께 1979년 9월 26일 김재규와 마지막으로 만났다고 했다. 그는 이 만남에서 한국의 평화적 정권교체(이양)에 대해 언급했다고 10·26사태 후 거의 한 달이 지난 후에 뒤늦게 내부적으로 보고했던 것이다. 이 자료는 1999년 글라이스틴의 회고록과 함께 역시 늦게 대중에 공개됐다. 

글라이스틴이 박정희 정부의 권력승계 문제를 언급한 것은 김재규의 확대해석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높은 사건이었다. 미국이 박정희의 종신집권과 한국의 권력승계에 관심을 가지면서 박정희 이후를 고려하고 대비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3권: 499∼500쪽). 정권교체의 시그널을 김재규가 미국으로부터 포착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당시 한국인들이 믿었듯이 김재규의 행동에 미국의 정보기관 파트너가 최소한 긍정적인 신호를 보낸 정도로 미국이 가담했던 것은 거의 사실이다(3권: 515∼516쪽). 김재규는 글라이스틴-브루스터와의 위와 같은 마지막 만남(1979년 9월 26일)에서 글라이스틴이 유신체제 전복에 대해 말했었다고 재판과정에서 주장했다(3권: 498쪽).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에 과연 미국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사진=위키백과

미국의 박정희에 대한 비판적 태도(반 박정희 캠페인)는 미국이 의도했던 것은 아닐지라도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에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글라이스틴도 1986년 발간된 책에서 “미국의 행동과 말이 박정희의 죽음에 간접적으로 기여했을지도 모른다”라고 분석한 바 있다. 또한 글라이스틴은 1999년 회고록에서 “미국은 자신들의 행동과 말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박 대통령의 몰락에 일조한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라며 반성적 문제제기를 했다. 이는 10·26사태에 미국의 힘이 작용했음을 우회적으로 기술한 회고이며, 외교 분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만큼 이 정도가 미국 측 핵심 인사가 남길 수 있는 최대한의 고백이었다. 전술한 11월 19일 전문에서 보인 책임 회피적 발뺌성 합리화에서 일보 전진해 관여 사실을 부분적으로나마 인정한 비판적 성찰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계획적인 사전 공모는 없었으나 박정희 정권 교체에 대한 이심전심격인 묵시적 사전 동조와 사후 묵인(내정간섭을 우려해 배후를 철저히 은폐하면서 공개적 지지를 회피)이 있었다. 

따라서 박정희 제거라는 결과는 김재규와 미국의 합작품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이전부터 추구했던 미국의 박정희 제거 공작이 김재규를 통해 직접적이 아니라 내정간섭을 회피할 수 있는 우회적 행태로 보다 교묘하게 결실을 맺음). 상대적으로 민족주의적이었던 자주파 박정희를 동맹파 김재규가 미국의 공작적 영향력 아래에서(보다 적극적으로 확대해석하면 미국과 합작하여) 제거했다고 할 수 있다. 자주파와 동맹파 대결 차원으로 거사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사회과학부 교수·한국정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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