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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66] 촘스키의 행동 아나키즘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66] 촘스키의 행동 아나키즘
  • 박홍규
  • 승인 2023.11.27 08: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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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세계사회포럼에서 연설하는 노암 촘스키의 모습이다. 사진=위키디미어

미국의 언어학자이자 철학자인 노암 촘스키는 자신의 전공인 언어학 분야에서도 혁명가이지만, 세계적으로 가장 활발한 사회 비평가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특히 ‘자유주의적 객관성’이라는 가면 뒤에 자신의 진정한 이익을 숨기는 미국의 정부와 지식인 기득권층과 미국 언론의 비굴함에 대해 비판적이고, 자신을 아나키스트라고 밝힌다. 

촘스키는 그의 아나키즘과 언어학이 완전히 별개라고 주장하지만, 그의 언어학이 언어를 과학적으로 분석한 결론이듯이 그의 아나키즘도 마찬가지로 모든 정치이론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결론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촘스키에게는 아나키즘도 과학이다. 반면 사람들은 보통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라고 하고, 혼란과 폭력, 분열 등을 연상한다. 또 무정부주의자들이란 ‘기본적인 규칙도 없는 무질서한 사회’를 만들려는 헛된 꿈을 꾸는 몽상가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무정부주의가 촘스키 사상의 주요한 원천이라고 하면 ‘촘스키를 좀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대부분 놀란다.

아나키즘, 촘스키 사상의 주요 원천

촘스키는 존 스튜어트 밀과 마찬가지로 빌헬름 폰 훔볼트가 『국가행동의 한계』(1801)에서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에 깊은 감명을 받고 아나키스트가 되었다. 또한 루돌프 로커가 모든 인간은 ‘자유와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것에 대한 본질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믿음에서 아나키즘이 나온다는 말에 동의한다. 

대부분의 사회주의자와 아나키스트는 성격이 대체로 환경의 산물이라고 주장했지만, 촘스키는 ‘인간 본성’이라는 생물학적 개념을 공식화하려고 했다. 인간만이 언어를 창의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그는 ‘인간 본성의 본질적 속성이 인간에게 자유와 다양성, 개인의 자기실현 가능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회적 조건과 사회적 형태를 창조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믿음에 모순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그는 자유에 대한 바쿠닌의 견해는 각 개인에게 잠재된 모든 힘의 완전한 발전이며, ‘개별 본성의 법칙에 의해 결정된 것 외에 제한으로 간주될 수 없는 제한을 인정하는 자유의 한 형태’라는 말을 인용한다.

이러한 법은 외부 입법자 또는 우리 위에 있는 어떤 사람에 의해서도 부과될 수 없다. 이러한 자연법은 인간을 제한하지 않고 인간의 자유를 위한 실질적이고 즉각적인 조건이다.

언어학자로서 보편문법을 연구한 촘스키는 인류가 모두 공통적인 이성을 가지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이성을 가진 개개인 사이, 나아가 사회와 국가 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것은 전쟁과 폭력이 아닌 대화와 소통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자신의 지속을 위해서 인류를 탄압, 학살하고 여론을 조작하는 정치권력과 자본에 대해 저항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모든 국가는 특권 엘리트에 의해 통제된다”

촘스키의 아나키즘은 권력에 대한 그의 확고한 비판과 피부색에 관계없이 모든 국가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통치하는 특권 엘리트에 의해 통제된다는 그의 견해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는 아나키즘을 사회주의의 리버테리안적 분파로 본다.

그러나 그는 아나키즘을 학설이 아니라 여러 가지 발전 방식을 갖고 있고 역사의 영구적인 가닥으로 남을 사상과 행동의 역사적 경향으로 본다. 그가 개인적으로 아나키즘에 매력을 느끼는 것은 자유로운 제도와 구조의 틀 속에서 복잡하게 조직화된 산업 사회를 다루는 문제를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아나키즘의 경향 때문이라고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국가 이성을 위하여』(1973) 표지

촘스키의 아나키즘, 아나코-생디칼리즘

촘스키는 『국가 이성을 위하여 For Reasons of State』(1973)에 실은 「아나키즘 소고」에서 자신의 아나키즘을 아나코-생디칼리즘(Anarcho-syndicalism)이라고 하고, 그것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 뒤 모든 새로운 세대는 새로운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이론과 실천방법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과거의 선배들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그가 언급한 선배들은 프루동, 바쿠닌, 푸리에와 같이 아나키즘 역사에서 흔히 다루어지는 사람들도 있지만 게랭, 산티얀, 펠루티에, 부버, 청년 마르크스, 로커 등도 포함되며, 심지어 종래 아나키스트로 소개된 적이 없는 토크빌, 파네쾨크, 피셔, 주히 등도 포함된다. 

산티얀은 20세기에 아르헨티나와 스페인에서 활동한 아나키스트로 아나키즘 사회의 조직에 대해 자세한 계획을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펠루티에는 1890년대의 아나코-생디칼리스트이고, 피셔는 최초로 8시간제를 요구한 1886년의 헤이마케트 사건의 순교자로 “모든 아나키스트는 사회주의자이지만 모든 사회주의자가 반드시 아나키스트는 아니다”라고 했다.    

촘스키에 의하면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특히 자본주의의 도래 이후, 거대한 사유 자본과 기업들은 끊임없이 정치권력을 통제하고 불평등을 시스템화하면서 부를 증폭시켜 나갔다.

정부가 거대한 자본에 대해 억압하는 것을 반대하며 ‘신자유주의’를 외쳤지만, 결국 신자유주의자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바는 정부의 억압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정부를 억압하고 조종해 자신들의 이익을 최대화한다는 것을 촘스키는 지배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노동자들 - 시민들이 모여 정치-자본 권력에 저항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촘스키는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라는 견해도

비록 아나키스트라고는 하지만 촘스키는 언제나 노동자들의 결속과 시민들의 필수적인 생활에 대한 지원과 보장, 즉 의료보험, 복지 등의 필요성을 주장하기 때문에 그의 정치사상을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Libertarian Socialism)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수도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촘스키 본인도 자유지상주의자라로 잘 알려진 론 폴과 자신의 비교에 대해 질문을 받았을 때 자신은 리버테리안 사회주의에 더 가깝다고 말했다. 즉 촘스키는 우익 아나키즘 내지 자본주의 아나키즘에 가까운 미국의 리버테리안 또는 리버테리아니즘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촘스키는 아나키즘에 대한 회의론에도 적극적으로 대처해왔다. 가령 영국의 철학자인 마틴 홀리스(Martin Hollis)가 아나키즘은 인간 본성이 선하다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가능하고 아나키스트들은 인간 본성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데, 역사는 그것을 믿을 수 없음을 보여주기 때문에 아나키즘은 지나치게 이상적인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촘스키는 인간은 그 본성에 대해 잘 알지 못하므로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의견에 불과하고,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일관된 방향, 즉 자유와 정의, 참여와 민주주의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점령하라』, 89쪽) 한다고 주장했다.   

자본 권력과 지식인 사회 비판

촘스키는 아나키즘의 진실을 알리는 데 그치지 않고, 아나키스트의 관점에서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점을 비평한다. 여느 아나키스트들과 마찬가지로, 촘스키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 권력과 그 국가 권력을 떠받치고 있는 허울 좋은 대의민주주의와 선전체제를 비판한다. 그리고 시대 변화에 따라 더욱 유연해지고 교활해지고 있는 ‘민간 폭정체제’를 구성하는 자본권력과 지식인 사회를 비판한다.

특히 촘스키는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이라는 저서가 있고, 교육에 대해 많은 발언을 했지만 교육학자가 아니고 교육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적도 없다. 그러나 미디어 통제와 같은 방식으로 교육 통제가 이루어졌음을 비판하고 학생의 자율성을 확보해주는 새로운 교육을 주장한 점에서 교육이야말로 그의 아나키즘이 가장 잘 구현된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 표지

촘스키가 말하는 바람직한 교육이란

그는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에서도 바람직한 교육에 대해 말한다. “중요한 사건이나 현상에 대하여 능력껏 진실을 찾아내어 그 진실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정확히 알려주는 것은 도덕적 명령이다.”(38쪽) “정직을 사명으로 생각하는 교사의 책임은 무엇보다 진실을 말하려 노력하는 자세에 있다.”

“학생들을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건설적으로 참여하기를 소망하는 공통의 관심사를 지닌 공동체의 일원으로 생각해야 하며,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말하지 말고 더불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교사가 학생의 학습을 돕는 최선의 방법은 학생 스스로 진실을 찾도록 일깨워주는 것이다.

그리고 교사는 학생들에게 거짓과 진실을 판별할 능력을 길러주어야 한다.”(39쪽) “교사의 의무는 학생들이 진실을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것이지, 학교에 관한 정책을 입안하고 설계하고 결정하는 부와 권력을 쥔 집단을 당혹스럽게 만들 수 있는 정보를 감추고 통찰력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다.” 

『촘스키, 세상의 물음에 답하다』 표지

이어 『촘스키, 세상의 물음에 답하다』에서 현재의 학교를 비판한다. “학교는 질서와 명령을 포상하고 독립적인 정신을 처벌한다.”(222쪽) “학교는 학생을 복종과 순응으로 길들이고 세뇌당한 통제 가능한 시민으로 양성하는 것으로 그 역할을 수행하고 그 대가로 제도권으로부터 후원을 받는다.” “학교가 경쟁을 강조하고 부추기는 것은 학생을 통제하는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225쪽)

촘스키의 이러한 교육론은 학생의 자율성과 비판적 사고와 협동정신을 무시하고 지식위주, 입시위주, 성적위주, 학벌위주, 출세위주, 개인위주인 우리 교육에 경종을 울린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했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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