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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연구행정이 어려운 이유
여전히 연구행정이 어려운 이유
  • 송병찬
  • 승인 2023.11.29 08: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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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_ 송병찬 한국연구재단 연구위원

 

송병찬 한국연구재단 연구위원

2006년 한국연구재단에 입사했다. 전공을 살려서 방송사 취업을 준비하던 중에 우연한 기회로 원서를 넣어 합격하고는 어느덧 열일곱 해가 지나갔다. 다시 말해,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 어떤 자질이 필요한지 어렴풋하게만 이해하고 운 좋게 들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지금은 후배들이 물어보는 것을 쉽게 알려줄 수 있고, 외부에서도 간간히 자문을 요청해 오는 걸 보면 시간을 헛되게 보낸 것 같지는 않다. 주변을 둘러보더라도 그동안 의미 있는 변화들이 있었다.

연구자를 지원하는 예산 규모가 크게 늘었고 기초연구나 인력양성에 대한 정부 관계자와 국민의 인식도 눈에 띄게 개선되었다.

한국의 연구자들이 여러 분야에서 유력한 노벨과학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하고, 대규모 연구개발 예산 삭감이나 지역으로의 권한 이양과 같은 정책 이슈에 대해서도 연구자뿐만 아니라 학생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담론이 형성된다.

장기적으로 보면 국가연구개발사업이 선진국형으로 발전하는 데 있어서 소중한 양분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는 여전히 연구행정을 잘하기가 어렵고 요원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어떻게 하면 더 전문적이고 효율적으로 일하고, 정부 예산이 적재적소에 잘 쓰여 우리나라의 미래를 밝게 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까.

먼저 시간이 필요하다

첫째, 시간이 필요하다. 연구비 펀딩(funding) 및 연구관리 전문기관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선정평가라고 할 수 있다. 접수된 모든 과제가 연구자의 피와 땀이 깃든 것이겠지만, 한정된 정부 예산으로 지원하는 만큼 ‘옥석’을 가릴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미국 국립과학재단과 같은 최고의 기관은 선정평가에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공고부터 접수까지 3개월, 평가자 선정과 전문가 동료평가, 후보 과제 추천 등에 6개월, 예산 및 규정 등에 관한 실무적 검토와 연구비 지급에 1개월 등 기본적으로 10개월 정도가 소요된다.

유럽도 마찬가지다. EU의 대표적 정부지원 사업인 ‘호라이즌 유럽’은 연구계획서 검토 및 평가에만 5개월, 협약서 검토 및 작성에 3개월 정도가 소요된다. 과제 공고부터 연구계획서 준비 및 제출까지 1~2개월, 평가와 협약에 보통 1개월 정도가 주어지는 한국과 대조적이다. 평가를 예로 들었지만, 전반적으로 시간과 여유가 없어 아쉬울 때가 많았다.

직원 한 명이 관리해야 하는 과제 수가 지나치게 많은 것이 근본적인 문제지만 예를 들어, 막대한 연구비를 지원함에도 연구자는 왜 자율성이 부족해 성과가 안 나온다고 하는지, 동료평가(peer review)로 과제를 선정하지만 왜 정성평가를 해야 한다고 하는지, 그리고 그 배경에 깔린 과학과 기술의 차이는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 들어보고 살펴봐야 더 잘 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기회는 많지 않았다.

오히려 외부의 급박한 자료 요구까지 대응하다 보면 새로운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여유가 사라지고 수동적으로 되곤 했던 것 같다.    

전문가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둘째, 사람이 필요하다. 모르는 것을 물어보면 쉽고 정확한 답을 해줄 수 있는 ‘전문가’를 만나기 쉽지 않다. 입사 초기 관련 법령도 없이 일하는 담당자가 많았던 것에 비하면 많은 발전이 있었지만, ‘연구행정의 꽃’이라고도 볼 수 있는 연구기획과 관련해서 “업계에는 연구과제 기획 전문가가 부족하다”고 한 국책 연구기관 연구자 얘기는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간혹 성과분석, 특허제도, 연구윤리, 국제협력 등 특정 부문에 대해서는 전문성을 쌓아오신 분들이 계셨지만, 연구자가 어느 부분을 어떻게 질문할지 예측하기 어려운 연구행정의 업무 특성상, 연구관리 전반에 대해 깊이 있게 이해하고 알려줄 수 있는 소위 ‘제너럴리스트(generalist)’는 많지 않다.

여러 부처의 연구관리 법령이 혁신법으로 일원화되었지만 매뉴얼까지 포함하면 한 사람이 숙지하기에 만만치 않은 양이 된 반면에, 법 조항 간의 정합성 부족, 규정과 아이리스(IRIS) 시스템과의 기준 차이(과제 이관 시 간접비 산출 등) 등으로 인해 논리적인 이해와 설명이 쉽지 않은 부분이 남아있다.

다만, 최근에는 놀라울 정도로 발전한 대학 산학협력단의 전문성을 통해 희망을 보게 된다. 2003년 산학협력법 개정에 따라서 대학에 산단이 설치되기 시작한 지 20년, 말하자면 임계점(tipping point)이 있었던 것 같다. 연구비뿐만 아니라 지식재산, 기술이전 및 사업화 등을 놓고 함께 얘기 나눠보면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혁신법이나 아이리스 설명회 같은 데 가보면 예산 규모가 상대적으로 적은 연구관리 전문기관 담당자들의 전문성에 또 한 번 놀란다. 한 사람의 담당자가 연구기획부터 성과관리까지 업무 전반을 꿰뚫는 질문을 자신 있게 하는 모습 때문이다. 사업 규모가 작은 기관에서는 단기간에 여러 부서를 거쳐 자연적으로 연구행정 전주기를 경험할 수 있는 덕분으로 보인다. 

한국 특성을 반영한 연구지원 모델이 필요하다

셋째, 모델이 필요하다. 특히 지원 사업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데 있어서 실제 연구 현장과 한국적 특성을 반영한 연구지원 모델이 필요하다. 모델은 논리 모형이나 프로그램 이론 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예컨대 왜 기초연구는 상향식으로 지원해야 하는지, 하향식을 통해서는 어떤 다른 것을 기대할 수 있는지, 개인연구는 집단연구와 어떻게 다른지 등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틀이자 시각화 자료가 모델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모델의 부재는 특정 기관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많은 경우에 당위적인 접근을 통해 문제점과 선진국 사례를 들어 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어렵게 예산을 확보해 사업을 추진하더라도 처음의 지원 목적이 달성되었는지는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받는다. 

미국의 사례를 들면, 미국은 정부 예산 수립 가이드라인에서 정부성과법(GPRA)에 따라 투입과 산출 간의 논리적 관계를 표현하도록 하는 등 사업 논리 모형을 정부 행정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도 많이 권장되고 있고 하향식(Top-down) 사업들은 전략계획서와 성과보고서 등을 작성할 때 정부의 표준화된 지침에 따라 일부 차용하고 있지만, 기획부터 성과관리에 이르기까지 사업 추진 전반에 설득력 있게 활용되지는 못하고 있다. 

연구행정의 선진화를 위해

연구행정의 선진화, 결국은 연구기관과 전문기관의 독립성, 자율성 문제로 귀결되는 듯하다. 국가연구개발 지원 체계에 있어서 외형은 과학기술 선진국에 못지않은 틀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 중요한 것은 관계된 사람들의 의식과 연구현장의 문화와 같이,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한 단계 더 성숙하는 게 국가연구개발사업을 혁신하고 세계를 놀라게 할 연구성과를 창출하는데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요즘 젊은 세대 사원들은 뛰어난 IT 역량을 바탕으로 어려운 일도 쉽게 처리하고 규정에 근거해서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일하려고 노력한다. 상급자나 정부부처 관계자를 상대로도 똑 부러지게 자신의 업무를 설명하고, 시간 관리를 잘해서 일찍 퇴근하고 효율적으로 일한다.

아마도 이런 업무 태도는 이 세대가 퇴직할 때가 되면 전문성, 독립성, 효율성 측면에서 큰 차이로 나타날 것 같다. 진정한 혁신은 세대가 바뀌어야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인슈타인은 말했다. “매번 똑같은 행동을 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라고. 

송병찬 한국연구재단 연구위원
2006년 한국연구재단 입사 후 연구개발·인력양성·산학협력 등의 사업 관리와 기술료·연구비·연구시설장비 제도의 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연구행정 개선을 위해 노력해 왔다. 현재는 연구비 네거티브 제도화, 효율적 지원 거버넌스, 과학기술 의식과 문화 선진화에 관심을 가지고 정부 정책에 좋은 아이디어를 제공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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