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16:10 (토)
유해한 사회에 무해한 사람은 없다
유해한 사회에 무해한 사람은 없다
  • 이진우
  • 승인 2023.12.07 08: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고_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 필자와 모임의 동의를 얻에 이 글을 게재합니다. 글의 출처는 <성숙한사회가꾸기모임> 소식지 ‘성숙의 불씨’ 제 858호 「‘유해한’ 사회에 ‘무해한 사람’은 없다」

종종 하나의 단어가 시대정신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 정신분석학자 라캉이 말한 것처럼 잠재의식은 사람들이 말하는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온갖 문제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 무엇이 정말 문제인지를 가늠하기 어려운 21세기에 시대정신을 포착하려면 사람들이 어떤 말을 주로 입에 올리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모두 각자 자신의 문제에 매달려 살아가지만, 우리의 말은 은연중 시대정신을 내보일 수 있다.

전쟁과 팬데믹, 양극화와 사회정의, 환경과 기후변화와 같은 굵직한 말들을 걷어내면 비로소 잘 들리지 않았던 자잘한 목소리들이 또렷이 들려온다. 수많은 개인이 일상생활에서 겪는 고통이 소리 없는 절규처럼 다가온다. 한동안 도서 시장의 대세였고 여전히 꺾이지 않는 에세이 류의 글들을 읽어보면 담담히 그려낸 개인의 경험 속에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관계를 맺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어느 인기 드라마 여주인공의 대사처럼 지금은 관계도 고통스러운 노동으로 인식되는 시대이다. 그들은 모두 유해한 관계로부터 어떻게 자신을 지킬 것인가를 고민한다. 그들은 모두 유해한 사회에서 무해한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욕망한다.

언제부터인지 '해롭다'는 말이 우리의 일상을 파고들었다. 우리는 '유해하다', '무해하다'라는 말을 즐겨 쓰지만, 서구에서는 '톡식(toxic)'이라는 말이 소셜 미디어에서 유행한다고 한다. '유독하다' 또는 '독성이 있다'라는 뜻의 '톡식'이 2018년 옥스퍼드 사전의 올해의 단어로 선정되었다고 하니,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이 낱말은 이미 우리의 잠재의식을 표현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7세기에 미국에 처음 소개된 독성이라는 낱말이 당시에는 화학물질과 같이 어떤 물질이 위험한지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다면, 오늘날에는 이 단어가 관계, 사람, 조직 또는 특정한 경험을 '유해한' 것으로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21세기의 현대 사회에서는 무심코 던져진 말, 직장, 관계, 상황, 심지어 사람까지도 유해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가짜 뉴스로 범람하는 소셜 미디어가 사회 환경을 유독하게 만든다고 한탄한다. 틱톡과 같은 소셜 미디어를 보면 수많은 MZ세대는 자신이 관계를 맺는 친구와 동료가 유독하다고 고백한다. 소셜 미디어가 발전한 이래로 더 많은 사회적 갈등, 가정 폭력, 경찰의 만행, 증오 범죄 등이 방송되었으며, 끊임없는 알림은 소셜 미디어를 탐색하는 시청자의 분노와 유독한 에너지를 생성한다. 이렇게 유해한 환경에 노출되었기 때문인지 현대인들은 자신이 관계를 맺는 친밀한 친구와 동료까지도 유독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유해한 사회관계로부터 해방되어 타인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무해한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독성'을 은유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약과 독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잘 쓰면 약이 되고 못 쓰면 독이 된다는 말처럼, 독은 종종 우리의 고통을 완화하는 약이 되기도 하고 '달콤한 독약'처럼 우리의 삶을 서서히 망가뜨리기도 한다. 인간관계에서 우리를 서서히 망가뜨리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독성에 대한 고대 그리스의 은유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암시한다. 그리스어 '톡시콘(toxikon)'은 화살에 묻힌 독을 가리킨다. 독은 활처럼 멀리 있는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 독은 직접적인 치명타를 입히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몸을 서서히 무너뜨린다. 화살의 비유에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사람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것은 모두 독성이 있다. 다른 사람의 말, 눈빛, 표정과 몸짓, 존재 방식.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이 미래에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이해하지 못한 채 받아들인다.

결국, 인간관계의 유독성은 우리가 타인의 말과 행위, 그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달려 있다. 일상생활에서 말의 유독성과 잔인성이 즉각적으로 인식되는 것은 아니다. 습관적으로 원하지 않는 충고를 해대는 사람, 호의를 베풀면 권리인 줄 알고 무리한 요구를 하고 들어주지 않으면 비난을 하는 사람, 항상 자신에게만 관심이 집중되기를 바라며 끊임없이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는 사람, 매사에 부정적이고 끝없이 불평만 늘어놓는 사람, 늘 자기만 옳고 제일 똑똑해서 남을 가르치려 드는 오만한 사람, 남 잘되는 꼴을 보지 못하고 흉을 보며 뒤에서 험담하는 사람.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쉽게 '유독성 인간'이라 부르지만, 이런 포괄적 판단으로는 결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누군가를 그렇게 쉽게 해로운 사람으로 낙인찍는 것도 옳은 일은 아니지만, 매우 억압적이거나 폭력적인 사람을 제외하면 모든 유해한 사람이 실제 악당은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누군가에게 '유해하다'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것은 강력하고 깊은 낙인을 찍는 것과 같아서 인간관계를 더욱 유해하게 만든다. 문제는 유독성이 우리가 관계를 맺는 사람의 특성이기보다는 언제나 '관계의 유독성'이라는 점이다. 나에게 해로운 그 사람도 나와 관계만 없다면 좋은 사람일 수도 있다. 유독성은 언제나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생성된다. 관계의 유독성은 주체가 경험하는 괴로움, 즉 타자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괴로움에 바탕을 두고 있다.

우리는 관계에서 비롯된 갈등과 고통을 합리적으로 해결하지 못할 때, 우리의 관계는 삶에 해가 되는 독성을 띠게 된다. 이 세상에 타인의 영향을 받지 않는 순수한 주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원자화된 개인이 아닌 이상 우리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신의 주체를 형성한다. 만약 관계에 독성이 있다면, 그런 '유해한' 사회에 '무해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관계가 독성을 띠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우리가 그 관계를 자율적으로 관리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결코 다른 사람들과의 모든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유독한 관계의 해독제는 관계를 맺는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어쩔 수 없이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다른 사람을 유독성 인간이라고 단죄하기 이전에 자신에게 스스로 상처를 주지 않는 법을 먼저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철학)·『철학과현실』 편집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