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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정부의 고등교육 정책과 글로컬대학
현 정부의 고등교육 정책과 글로컬대학
  • 노중기
  • 승인 2023.12.12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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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논평_ 노중기 한신대 교수·사회학

 

노중기 한신대 교수

요즘 대학에서 생활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로 쉽지 않다. 대학에서 교수로 오래 살아온 사람들은 대개 아는 일이지만 연구도, 교육·강의도, 생활도 모두 그렇다. 나이가 든 탓인가 하면서 늘 반성하는 편이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른다.

한마디로 지금 우리 대학은 이제 서로 경쟁하고 갈등하는 시장 바닥으로 전락했다. 십여 개 가까운 트랙으로 쪼개진 교수사회는 더 이상 학문 공동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교수지만 교수가 아닌 교수’들이 가득한 대학에 제대로 된 연구와 교육이 있을 리 만무하다. 지적 대화는 물론 생활을 나눌 관계도 모두 사라져버린 것처럼 느껴진다. 

이제 대학은 자유와 진리의 전당이 전혀 아니다. 시장 바닥이자 정글이라면 과한가? 정년트랙과 각종 비정년트랙, 그리고 시간 강사라는 서열 지위는 굳건한 신분이 되었고 봉건적 차별이 일상이 되도록 만들었다. 한편에서는 정년트랙 교수의 이기주의와 탐욕, 신분 차별이 난무한다. 다른 편에서는 신분 상승을 향한 비정년트랙 교수의 연구와 강의 실적 쌓기 고투(苦鬪)가 동시에 뒤엉킨다. ‘학령인구 감소에 맞서 먼저 살아남아야 한다’라는 대학 당국의 합리적 협박은 이 모든 일을 정당화하는 동인이었다.

또 캠퍼스를 뒤덮은 플랭카드를 보면 대학은 기업의 보조 기관, 인력양성학원으로 전락한 것이 분명하다. 각종 취업 안내와 지원사업, 그리고 기업과의 산학협력이 대학 업무의 핵심이 된 지 오래다. 사업 수주로 이만큼 벌었다는 돈 자랑으로 뒤덮인 대학 교문과 캠퍼스를 돌아 출근하는 일도 커다란 고역이다.

또 그 돈벌이는 이미 연구와 교육에 앞서 대학과 교수의 주요 업무가 되어 버렸다. 요즈음 학생들이 교수를 돈 벌어 오거나 서비스노동을 공급하는 상인이나 노동자로 생각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 그렇게 가르쳤으니 그런 것이다.

그런데 그중에서 가장 괴로운 일은 강의실에서 우리 학생들을 보는 일이다. 언제부터인가 학생들에게 대학은 대학이 아니게 되었다. 지금 학생들이 대학에, 그리고 교수에게 기대하는 것은 자유와 진리와 정의, 곧 학문이 아니다. 그들은 정확한 출석 부르기와 공정한 학점 취득, 그리고 알바할 자유 시간과 교수들의 무관심만을 원할 뿐이다. 

특히 학생들이 교수의 출석 확인에 목을 매는 일이 잦아졌다. 이를 보는 마음은 매우 아프다. 10여 년 전부터 우리 학생들은 출석 체크에 매우 민감해지기 시작하였다. 평소 출석 부르기를 좋아하지 않는 필자에게 그런 변화는 예사롭지 않았다.

교육부가 교수들의 강의 부실을 문제 삼아 출석부를 감시하며 교권 탄압에 몰두하던 바로 그때였다. 출석 때문에 불공평한 평가를 받지 않아야 한다는 학생 나름의 심리적 압박과 교수의 불성실을 감시, 통제하려는 권력의 압력이 상호작용한 결과물이 아닐까 추측한다. 또 입시와 취업 경쟁에서 배운 능력주의로 무장한 학생들의 당연한 진화 과정이다. 필자의 감각이 너무 예민한가?

지금 우리의 대학생들에게 대학은 무엇일까? 아침 첫 시간부터 강의 중에 깊은 잠에 빠진 학생들을 보는 일은 더 이상 어렵지 않다. 깨어있어도 강의에 대한 반응이 점점 시들해지는 것도 쉽게 느낄 수 있다.

또 출석만 부르고 나면 교수 눈을 피해 강의실을 빠져나가는 학생도 심심치 않게 만난다. 아니 그런 학생들의 숫자는 매년 뚜렷이 늘고 있다. 반대로 학생들의 보고서에는 그들의 진심이 나타나 있었다. 대학에서 공부하고 생활하는 것보다 알바 노동자로 일하는 시간이 더 보람차고 즐거우며 배우는 바가 많다고 당당히 말한다. 한마디로 그들은 강의실에 끌려 나와 있는 것이다.

또 모든 일을 취업에서의 유불리로 따지고 학점 등에서 자신에게 불이익한 일에 대해 매우 날카롭게 반응하는 이기적인 모습도 늘 확인할 수 있다. 교수의 학점 부여는 쉽게 항의의 대상이 되며 교수의 결강은 때로 공격 대상이 된다. 물론 일부 교수의 비합리적인 학점 부여, 강의 부실은 심각한 문제다. 다만 필자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학생과 교수 사이에 기본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신뢰와 상호소통이 크게 무너졌다는 점이다. 대부분 대학에서 총학생회는 물론 학과 학생회가 구성되지 못하는 일은 이런 현실의 당연한 결과일 뿐이다.

한마디로 지금 우리의 대학은 죽었다. 과거에도 크게 살아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제는 완전히 죽은 것으로 생각된다. 수도권 외곽의 중소 사립대학에서 일하는 필자의 이런 생각은 지방으로 가면 더욱 진실일 것이다. 지방의 비(非) 거점 국립대, 그리고 사립대와 전문대에 과연 교육이 살아있을까? 거긴 이미 죽은 지 오래일지도 모른다. 아니 거점 국립대에서라도 우리 교육의 재생이 가능할까?

우리 대학의 이런 현실에 필자를 비롯한 교수들 책임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를 아무리 생각해봐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1995년 5.31 교육개혁을 출발점으로 한 30년에 걸친 국가의 대학파괴가 이 문제의 근본 원인이란 점이다. 

처음에 그것은 세계화의 무한경쟁 시대에 고등교육이 국가 경쟁력에 핵심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신자유주의 경쟁 논리에 따라 경쟁의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며 대학설립 자유화 조치를 갑자기 도입하게 된 배경이었다. 곧 수백 개 대학이 급조되었고 대학에 경쟁과 자본 논리가 급속히 확산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곧 닥친 IMF 외환위기로 말미암아 사정은 급속히 나빠졌다. 재정 긴축의 기조 위에서 진행된 재정 지원 축소와 구조조정을 국가는 대학 간 경쟁과 수월성이란 미명으로 은폐하였다. 정부 사업 수주 경쟁이 확산하면서 대학은 본격적으로 시장화되었고 산학협력 확대와 함께 기업의 부속기관으로 전락한다.

특히 신자유주의 사회 양극화로 출산율이 급속히 하락한 결과 학령인구 감소라는 특별한 조건이 대학 간 경쟁을 극단화하기 시작했다. 각종 비정년트랙교수 제도를 도입하고 그 수를 크게 늘려 대학이 비정규노동자 천지가 된 것은 그 당연한 결과였다. 교육부가 비정년트랙 제도를 만들고 정규 교원 자격을 부여해 자신의 재정 지원 의무를 회피한 결과였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대학과 대학생은 지난 30년 우리 국가가 전략적으로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30년 전 전국교수노조와 대학노조, 민교협을 비롯한 대학 주체들은 이 문제를 예감했고 나름대로 대응해온 것도 사실이었다. 여러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고 시위로 저항했으며 때로는 죽음으로 항거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이 모든 작업을 하나의 일관적인 과정으로 만들어 낸 것이 국가의 고등교육 전략이었다. 대학의 시장화 전략이라는 면에서는 수구 냉전 세력이나 민주당 세력이 전혀 구별되지 않았다. 김영삼 정부 이래 모든 정부는 선거공약으로 되풀이해 약속했던 고등교육 재정 확대, 대학 교육의 공공성 확대, 사학비리의 근절과 대학 민주화를 외면했다. 

30년 전부터 이 일에 참여했고 주도했던 이가 지금 두 번째로 교육부총리로 나서 다시 대학을 죽이고 있다. 새로운 고등교육 정책이라고 내세우며 강행하고 있는 지역혁신중심 대학지원체계(RISE) 사업과 글로컬대학 육성사업이 바로 그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교육부는 스스로 경제부처라고 생각해야 한다. 교육부의 첫 번째 임무는 산업발전에 필요한 인재공급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교육부 장관은 이에 맞춰 ‘산업과의 연계’에 방점을 둔 라이즈, 글로컬대학 사업을 밀어붙인다. ‘지방대 위기’에 맞서고 ‘대학 자율성’을 높이는 방안이라는 것이다. 글로컬대학으로 30여 개 대학을 선정하여 5년간 1천억 원을 준다는 당근도 발표했다.
혹자는 이를 대학 정책의 새로운 전환, 혹은 시도라고 말한다. 그런가? 그것이 과연 그들의 말처럼 지방대를 살리고 대학을 살리는 사업인가? 대학에 관심을 가진 모든 이들은 잘 알고 있다. 심지어 글로컬대학에 참가하거나 선정된 대학 교수들도 모두 아는 일이다. 진실은 정반대라는 사실을.

두 사업의 성격은 명확하다. 첫째, 지방대학 구조조정이다. 스스로 경쟁하여 학교 문을 닫게 하고 잉여 인력, 교수와 직원을 몰아내려는 사업이다. 돈을 걸고 경쟁을 시키는 것은 그 책임을 대학 주체들에게 넘기려는 얄팍한 술책이다. 대학을 늘리고 곧 그 대학이 망하게 만든 것은 교육부였으나 그 정책적 책임을 회피하겠다는 것이다. 반대로 굳건한 대학 서열화 속에서 서울이나 수도권 대학은 여전히 무풍지대다.

둘째, ‘대학 자율성’ 중심의 정책 기조 변화도 전혀 아니다. ‘지역혁신’도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지방정부에 대학 폐교의 정치적 부담을 전가하는 동시에 재정적 부담을 회피하는 수작을 넘지 않는다. 윤석열 정부의 규제 완화는 수도권 서울에 규제를 푸는 정책적 반동임을 모르는 이가 없다.

그런데 교육만 지방 중심이라니 전혀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중앙 권력이 교육행정 지배 권리를 포기할 리는 만무하다. 그러므로 그 자율은 지방대학 몰락을 정부가 방관하는 자율, 나아가 문 닫는 지방 사학 족벌 재단이 투자한 금액을 맘대로 뽑아 갈 자율 외에 어떤 것도 아니다.

셋째, 두 사업은 이미 크게 줄어든 기초학문을 지방대에서는 완전히 죽일 것으로 보인다. 지난 30년 동안 인문·사회과학, 기초과학과 예술학은 고사 직전에 이르렀다. 지역 산업에 특화된 대학-산업 협력을 모토로 내건 글로컬은 그 최종적 사망 선고일 수밖에 없다. 이제 거점 국립대에서도 기초학문을 볼 수 없는 날이 성큼 다가왔다. 

대부분 교수, 특히 지방의 교수들은 이런 국가 정책의 본질을 이미 잘 알고 있다. 이십 년 넘게 겪은 일과 본질적으로 같기 때문이다. 과거의 ‘지방대 살리기’ 여러 사업과 전혀 다르지 않음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그런데 많은 지방대 교수는 여전히 자기 대학, 자신들만은 예외라고 생각하고 다시 매달린다. 30개만 살아남아도 나만, 우리 학교만 살면 그만인가?

지난 30년 되풀이해 온 이런 희·비극의 끝은 어디일까? 대학과 교수가 나만은 살 수 있다고 돈이 달린 공모사업에 매달리는 동안 대학은 죽어왔다. 지방이든, 수도권이든 마찬가지다. 심지어 서울의 대학에서도 이제 대학은 죽었다. 우리의 아이들이 죽은 대학에서 죽은 교육을 교육받으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일은 정말 힘든 일이다. 

※ 이 글은 국립경상대 사회과학대가 발간하는 『사회과학2.0』에 실은 글이다.  

노중기 한신대 교수·사회학
전국교수노동조합 위원장을 지냈다. 민주노총 정책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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