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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이 좋아하는 한국 애송명시
시인들이 좋아하는 한국 애송명시
  • 최승우
  • 승인 2024.01.31 21: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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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인협회 편집│이도헌 그림│문학세계사│192쪽

한국 현대시 100년의 정신적 스펙트럼!

서정주의 「자화상」에서 기형도의 「빈집」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시인들이 평소에 즐겨 읽는 애송시를 한 권의 시집으로 묶은 『시인들이 좋아하는 한국 애송명시』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우리나라 시인들이 즐겨 애송하는 시는 무엇일까? 문학세계사는 국내 현역시인을 대상으로 자신의 애송시 3편을 답해 달라고 하였다. 시단의 원로 시인인 김춘수(작고), 이형기(작고), 김남조, 김종길(작고) 시인에서부터 중진 시인인 정진규(작고), 이근배, 김종해, 유안진, 오규원(작고), 강은교, 중견 시인인 황인숙, 박주택, 이재무, 이문재, 장석남, 함민복, 이윤학, 박정대, 정끝별 등과, 젊은 시인 권혁웅, 문태준, 손택수, 안현미, 황병승(작고) 시인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시단을 대표하는 246명의 시인이 설문에 응해 주었다. 직접 시를 쓰고 있는 시인들이 답변하기에는 곤란하고 까다로운 설문 조사였지만, 며칠에 걸친 심사숙고 끝에 설문에 답해주었고 때로는 그에 대해 다시 수정하기도 하며 진지하게 응답해 주었다. 두 달 동안 집계된 애송시 목록은 한국 현대시 100년의 새로운 지형도를 나타내 보였다. 

시인들이 선정한 ‘느낌이 빠른 시’, ‘귀로 듣는 시’

어떤 시가 누군가에 의해 애송된다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충분히 가치 있는 것이다. 시인들이 좋아하는 애송시집의 출간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출간된『시인들이 좋아하는 한국 애송명시』는 시인들의 개인적 주관에 의한 선택이기는 하지만, 시를 보는 눈이 보다 전문적이고 주체적인 ‘현역시인’들의 심미안이었기에, 한국 현대시의 정신적 스펙트럼을 펼쳐 보일 수 있다는 의미가 있다. 또한 화가가 좋아하는 그림, 영화인이 좋아하는 영화가 있듯이 ‘시인이 좋아하는 시는 어떤 시일까?’라는 일반 독자가 지닌 호기심과 기대치도 메워줄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시를 직접 창작하고 있는 시인 246명의 보다 섬세하고 예리한 시적 감성을 확인해 보는 것 자체도 또 다른 즐거움이 된다.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시인은 서정주이지만 여러 작품에 분산되어 있는 반면, 김춘수 시인의 경우는 한 작품「꽃」에 집중되어 있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은 존재의 아름다움을 ‘연시의 구조’ 속에 담고 있다는 점에서 매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를 연시의 일종으로 체험함으로써 어려운 형이상학적인 존재의 문제는 일거에 아주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차원의 문제로 바뀌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이 시가 가지는 대중적인 호소력이 아닐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김춘수, 「꽃」 전문

연애나 사랑의 감정 구조가 가지는 감염력 못지않게 시인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원초적인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같은 감정들이다. 윤동주의 「서시」는 순수하지 못한 세계 속에서 삶을 감내해야 하는 인간으로서 가지는 원초적인 괴로움에 대한 한 선언이다.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은 타지에서 느끼는 외롭고 무기력한 삶에 대한 회한을 절절하게 노래하고 있는 시이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라는 제목 자체가 이러한 외로움과 고독 그리고 무기력함을 북방의 정서에 실어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무엇보다 이번 시집 출간의 의미는 한국의 아름다운 명시가 일반 독자에게 보다 많은 사랑을 받고 널리 애송되는 것에 있다. 일반 독자들에게 애송되는 ‘귀로 듣는 명시’와 ‘읽히는 명시’ 등 좋은 우리시가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의 정서는 순화되고, 한국 현대시는 일상 속에서 더욱 풍요롭고 아름다워지게 될 것이다.

설문 결과

설문 결과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미당 서정주 시에 대한 시인들의 압도적 선호이다. 과거 문단 안팎에서 서정주를 깎아내리려는 분위기가 짙었다. 주로 정치적인 관점에서 서정주와 그의 시는 매도되었다. 이와 같은 서정주 시와 시인에 대한 평가와 인식을 염두에 둔다면, 이번 설문 결과가 의미하는 바는 중요하다. 하지만 앞선 상황 속에서 서정주 시의 본질적인 가치와 상관없는 매도의 분위기는 시문학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중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서정주의 시 대신 대다수 독자에게 공감받지 못한 시가 실리는 시적 가치의 전도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훌륭한 문화유산의 가치를 모르고 그렇게 헐뜯는 현실에 대해서, 서정주의 시적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크게 안타까워했다. 이런 상황에서 서정주의 시가 시인들로부터 가장 사랑받고 있다는 설문 결과는, 서정주의 시가 정당한 평가와 사랑을 받게 되는 데 튼튼한 근거와 토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었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니……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었다 한다.
스물 세 햇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어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우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 서정주, 「자화상」 전문

설문 결과가 보여주는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소위 민중시 계열의 시인이나 작품들이 별로 언급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번 설문 조사 결과를 보면,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민중시들은 시인들의 사랑이나 인정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인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민중시가 진지한 자기반성을 할 필요가 있음을 뜻한다.

애송시의 명단은 애송시인의 명단과는 좀 다르다.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로 뽑힌 작품은 김춘수의 「꽃」이다. 모두 23명의 시인이 자신의 애송시로 이 작품을 언급했다. 그리고 2위로 뽑힌 작품은 윤동주의 「서시」이다. 모두 18명의 시인이 이 작품을 좋아했다. 김춘수의 「꽃」과 윤동주의 「서시」 두 편 모두 명시라고 할 수 있다. 「꽃」은 감상과 지성, 감각과 사유가 절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작품으로 호소력이나 전달력이 매우 높다. 그리고 「서시」는 그 단순함과 순수함이 아름다운 결정을 이룬 작품이다. 

시인들의 애송시에 대한 설문 조사 결과는,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 시단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 같다. 긍정적인 면들도 드러나고, 부정적인 면들도 드러난다. 정말 좋은 시를 애송하는 시인들, 독자들이 점점 많아져야 우리나라 시가 발전할 것이고, 시단이 건강해질 것이다. 

최승우 기자 kantmani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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