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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졸업식 축사를 기대하며
재미있는 졸업식 축사를 기대하며
  • 김병희
  • 승인 2024.02.05 09: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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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_ 김병희 편집기획위원 /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김병희 편집기획위원

졸업식장에 가보면 축사하는 분들이 등장한다. 졸업의 의미를 강조하는 여러 형태의 축사가 졸업식장에 울려 퍼진다. 대학 본부에서 주관하는 전체 졸업식은 물론이거니와 별도로 준비한 학과 행사에서도 축사가 이어진다. 졸업 축사를 대강 톺아보면 졸업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상투적인 표현이 많다. 심지어 ‘졸업식 축사 모음집’을 검색해 일부 표현만 살짝 바꿔 쓰는 경우도 있으니, 진부한 내용이 난무하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자주 등장하는 상투적인 표현은 대강 이렇다. 평온했던 학창 시절이 끝나고 냉엄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으니 남다른 각오와 자신감으로 꿋꿋이 헤쳐 나가라거나, 부모님의 도움으로 대학까지 졸업했으니 앞으로는 부모님께 손을 벌리지 말라고 권고하는 내용이다. 성실하게 살다 보면 언젠가는 빛을 볼 테니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맡은 일을 묵묵히 감당해 나가라거나, 상대방을 이기려하지 말고 져준다는 마음으로 양보하다 보면 결국 기쁨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덕담도 있다.

모두 귀한 말씀인지라 현장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분들도 있고 반응도 좋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다. 졸업식장을 빠져나가는 순간 도대체 무슨 말을 들었는지 가물가물하게 느끼는 학생들도 많으리라. 모두 금과옥조(金科玉條) 같은 말씀인지라 오히려 평범해져버려 기억 세포에 저장되기 어렵다.

미국 대학교에서는 저명인사에게 졸업식 축사(Commencement speech)를 부탁하는 전통이 있다. 명사들은 짧게는 20분에서 길게는 60분 정도의 축사에서 유머를 섞어 가며 인생에 대한 조언을 한다. 졸업식 축사를 대학 시절의 ‘진정한 마지막 강의’라고 부르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2005년 6월의 스탠포드대학교 졸업식장에서 했던 연설이 사람들이 기억하는 가장 유명한 축사이지 싶다. “계속 갈망하라. 여전히 우직하게(Stay hungry, Stay foolish).” 그의 축사에서는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우직하게 도전하라는 메시지가 돋보였는데, 잡스는 자신의 인생 역정을 14분 동안 이야기한 다음 마무리 대목에서 강렬한 한 마디를 남겼다. 이처럼 졸업식 축사는 주옥같은 말씀을 길게 나열하는 것보다 촌철살인(寸鐵殺人)의 한 마디를 전달해야 효과적이다. 

졸업식 축사에서 상투적이고 진부한 내용을 전할 바에는 차라리 연사가 노래 한곡을 불러주고 연단에서 내려오는 편이 낫다. 졸업식 축사에서는 유머러스하게 말문을 열고나서 본론으로 들어가는 말의 순서 조정도 중요하다. 영화배우 로버트 드니로는 2015년 5월의 뉴욕대학교 티시예술대학의 졸업식 축사를 시작하며 이런 말을 던졌다. “여러분은 해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망했습니다(And you’re fucked).” 그 순간 폭소가 쏟아졌고 사람들은 시종일관 반어법으로 가득 찬 연설에 집중했으며 결국 명연설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졸업식 축사에서 뜻밖의 사례를 제시하며 역설적인 화법을 구사해도 좋다. 대학이 졸업생의 인생을 망쳤을 수도 있고, 전공과목을 공부하느라 인생에서 정말로 하고 싶었던 그 무엇에 쏟을 시간을 날려 버렸을 수도 있다는 반어법을 구사할 수도 있다.

현대 미술에서 순수 추상 회화의 선구자인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를 구체적인 사례로 제시해도 좋겠다. 미국의 철강 재벌인 솔로몬 구겐하임은 칸딘스키의 작품 150여 점을 사들여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의 설립 기반으로 삼았다. 미술로 진로를 바꾸기 전까지 모스크바대학교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했던 칸딘스키는 30살이 된 1896년에 대학 시절의 전공을 포기하고 독일의 뮌헨 아카데미에 입학해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모네의 그림을 보고 나서 그림이 자신의 영혼을 붙잡았다며 화가로서의 새 인생에 도전했다.

이런 칸딘스키에게 대학은 그 무엇에 쏟을 시간을 앗아간 장애물로 작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스티브 잡스를 비롯한 대학 중퇴자들이 자신이 꿈꾼 분야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는 사실도 대학의 존재 이유를 되묻게 한다. 대학의 숭고한 이념과 가치가 물론 세속적인 성공을 위해서만 존재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대학 졸업식은 해마다 돌아온다. 축사를 하실 분들은 상투적인 표현을 이제 그만 제발 멈추시기를. 재미있고 감동적인 축사를 준비해 ‘진정한 마지막 강의’를 들려주시길 기대한다. 

김병희 편집기획위원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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