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22:05 (토)
디지털 시대, 인문학의 미래를 말하다
디지털 시대, 인문학의 미래를 말하다
  • 최승우
  • 승인 2024.02.06 16: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엮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536쪽

디지털과 AI 시대, 인문학은 어떻게 변해가고 있을까?

인문학에는 ‘고리타분하다’는 인상이 천형처럼 각인되어 있다. 역사가 깊어서다. 하지만 인문학이야말로 시대와 함께 변해온 학문이다. 아니 인문학이야말로 시대의 변화를 가장 잘 보여준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10여 년 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교수진이 인문학을 소개하는 책을 발간했다. 그 사이 세상은 디지털과 인공지능 시대로 탈바꿈했다. 같은 시기 인문학은 어떻게 변해왔고 앞으로 어떻게 변용될까?

『디지털 시대, 인문학의 미래를 말하다』는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교수진 36인이 지난 10여 년 동안 디지털 인문학의 등장과 같은 인문학의 변화와 발전을 반영해 인문학의 미래를 조망한 책이다. 교수진은 ‘삶과 인문학’이라는 대학 교양 강좌에서 각자의 분야별로 인문학의 조감도를 강의한다. 이 책은 강의 내용을 중심으로 엮였지만 대학교 인문계열 신입생만을 위한 책은 아니다. 고교생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인문학에 대한 폭넓은 관심을 가진 독자들 역시 특별한 사전지식 없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집필되었다. 

책에는 인문학 분야별로 다양한 연구 사례나 현시점 중요한 안건들이 이해하기 쉽게 풀이되어 있다. 어떤 글은 어(語)·문(文)·사(史)·철(哲)의 분류에 충실하게, 한 분야에 대한 깊은 사색을 보이기도 하고, 또 다른 글은 인공지능과 인문학의 접점에서 고뇌하거나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날의 인문학에 대해 고찰하기도 하며, 또 어떤 글은 우리에게 익숙한 대상을 다소 낯선 인문학적 방법론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각기 독립적으로 구성된 36편의 글을 읽고 나면 독자는 어느 순간 인문학의 다채로움을 향유하고 있을 것이다. 글들은 직접 ‘인문학의 미래’를 단언하지 않는다. 하지만 독자들은 인문학의 다양한 면모를 접하고 이해하게 되면서 스스로 인문학의 미래를 그려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끊임없이 변모하는 인문학의 다채로운 조감도

인문학은 인간과 관련된 근원적인 문제나 사상, 문화 등을 중점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될 뿐만 아니라, 생활과 실천의 지표가 되는 학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날 인문학을 향한 관심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한편 인문학은 세상의 변화에 맞춰 진화해 왔다. 현시대의 인문학은 반드시 어느 특정 학문 분야에 한정되지 않고, 공학이나 의학 등을 포함한 거의 모든 학문 분야와 교류하고 융합하는 흐름을 보인다. 21세기 들어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인문학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있다. 역설적으로는 인문학의 외연이 사회의 변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확장하고 있는 셈이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학문을 섭렵하는 것은 차치하고 개략적인 파악조차 쉽지 않은 일이다. 인문학의 경우 그 분야가 크게 어·문·사·철로 나뉘고 첨단분야와의 통섭이 빈번하여 그 변화가 잦기 때문에 인문학 전체를 조망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이제 막 인문학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이 급변하는 흐름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기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디지털 시대, 인문학의 미래를 말하다』는 좀 더 많은 인문학 초심자에게 인문학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와 시야를 넓힐 수 있는 창구가 될 수 있다.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교수 36인은 이 책에서 각자의 전공을 살려 다양한 인문학 분야를 이해하기 쉽게 풀어놓았다. 인문학의 본질적인 가치와 의미를 풍부하게 짚으면서도 최신 인문학 연구 경향을 충실히 담은 글들이 한데 엮여 있다. 이 책은 인문학의 다채로운 면모를 하나하나 보여주고 느끼게 함으로써 독자가 인문학의 전체 모습을 조감하도록 한다. 책의 마지막 장은 덮는 순간 인문학 분야에 대한 개략적인 이해가 완성될 것이다. 

각각의 글들은 인문학의 중요성을 직접 역설하거나 명쾌하게 인문학의 미래를 제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저마다의 개성으로 가득 찬 형형색색의 읽을거리들을 접하고 난 독자들은 스스로 인문학의 다양한 면모를 향유하면서 저절로 인문학에 대한 개괄적인 조감도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책의 구성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인문학의 오늘을 진단하고 내일을 전망하다」에는 우리나라 인문학의 대안적 전망을 제시한 ‘신한국인문학’부터, 역사, 종교, 언어, 문학, 미학, 민속, 그리고 탈민족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문학 분야의 현재를 돌아보고 미래를 전망하는 12편의 글이 실려 있다. 2부 「인문학에 새로운 개념과 방법을 도입하다」는 오늘날 인문학 분야에서 시도하는 새로운 도전과 개척에 관한 11편의 글로 구성되어 있다. 3부 「인문학의 다양성을 향유하다」는 어·문·사·철 각 분야의 주요 작품이나 자료 혹은 개념 및 사상 등을 다룬 내용을 주로 담고 있다.
이 책은 각각의 글이 독립적으로 집필되었기 때문에 반드시 처음부터 끝까지 숙독할 필요는 없다. 독자의 관심사에 따라 책의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읽어나가는 게 가능하다. 

책 속에서
 
“좋은 삶을 위해 인문학자가 무엇을 하겠는가? 과학이나 기술 발전은 몰라도 인문학이?” 하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과거 몇몇 인문학자에게 꿈 같은 이상에 불과했던 목표들을 우리가 실현시켰기에 이렇게 잘살고 있지 않은가? 인종, 계급, 신분의 차별 없이 모두 평등하게 존엄성을 인정받으며 살아가는 세상이 그렇게 오래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오랫동안 이러한 공존은 이상에 불과했지만 이 이상이 있었기에 우리는 이를 실현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이러한 이상을 지켜내지 않으면 바로 소실될 수 있다는 점 역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 (1. 「‘신한국인문학’이란 무엇인가?」 26쪽)

역사학은 우리가 익숙하게, 당연하게 여기는 제도·삶의 방식·가치관 등등이 모두 ‘역사적’인 산물에 불과함을 일깨워 준다. 한국어에서 ‘역사적’이라는 말은 너무도 초역사적인 의미로 오용된다. 우리가 ‘역사의 심판’, ‘역사적 사명’, ‘유구한 역사’라고 발화(發話)할 때 많은 경우, 그 발화자는 ‘사학적 입장’보다는 ‘경학적 입장’에서 말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초역사적인 존재가 역사를 주재하고 있고, 역사는 결국 그 존재의 의지대로 전개될 거라는 감각 말이다. (…) 그래서 많은 역사가들은 재판관의 심성을 갖는다. 자신이 선험적인 진리를 알고 있고 그것으로 사물을, 사태를 판단·평가할 수 있다는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인간사에 선험적인 진리 따위는 없고, 경험적인 진리도 시간적·공간적 (즉 역사적) 제약으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역사학의 입장이다. (2. 「역사가는 재판관이 아니라 외로운 사람들」 29~30쪽)

세속화와 탈종교 현상은 현시점에서 불가피해 보인다. 또 이로 인한 무종교인의 증가 역시 전 지구적인 추세이다. 중동을 비롯해 세속화가 덜 진행된 사회들 역시 장기적으로 보아 마찬가지이다. 종교에 무관심한 젊은 세대의 출현은 종교가 마주한 위기를 뚜렷하게 보여주는데, 탈종교의 극단적인 심화는 곧 종교의 소멸로 이어질 것이다. 그런데 종교가 위축되면, 인간의 ‘종교적’ 열망도 함께 사라질까? 여기에는 반론도 적지 않다. 세속화된 사회에서도 여전히 ‘인간은 종교적이다’라는 주장이다. (3. 「종교의 미래: 무종교인의 증가 속에서 미래의 종교를 생각하다」 41~42쪽)

이처럼 뮤직비디오에는 비디오테이프, TV 화면, 캠코더와 캠코더를 들고 촬영하는 희수의 모습이 여러 각도에서 계속 등장함으로써 미디어 자체를 부각하는 하이퍼매개의 전략을 보여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 뉴진스의 모습은 희수가 찍은 비디오 영상을 통해 낡은 비디오 화면의 색채와 질감으로 표현된다. 갑작스레 흔들리는 핸드헬드 영상이나 과도한 빛의 노출, 초점이 흐려진 이미지들은 매개성을 부각하면서도 동시에, 실재의 한순간을 포착한 듯한 직접성과 진정성을 전달한다. 이는 “가장 하이퍼매개된 프로덕션조차도 그 자신의 고유한 직접성의 브랜드를 추구한다.”는 볼터와 그루신의 주장을 떠올리게 한다. (9. 「뮤직비디오, 기억의 매체와 매체의 기억」 130쪽)

오래전부터 국내외 학계에서 학문 간 ‘융합’ 혹은 ‘통섭’이 화두이지만 적어도 사진학만은 이 화두에서 벗어난다. 사진학은 다른 학문과 일부러 융합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지난 2백 년간 사진의 역사는 다른 분야들과 끊임없이 소통하여 형성된 융합의 역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사진 연구자에게 중요한 것은 사진을 어떻게 인접 학문과 융합할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진만의 ‘순수한’ 역사는 존재하지 않으며 타 분야들과 끊임없이 소통했던 역사 혹은 섞임의 역사였음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이다. (10. 「사진학은 융합하지 않는다」 135쪽)

그렇다면, 우리 시대가 오늘 우리의 인문학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문학의 실용성이나 효용가치를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인문학자로서 우리의 학문이 그저 옛 문장을 연구함으로써 문장을 바르게 해석하고 본래의 사상을 이해하려는 훈고학의 수준을 넘어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제공해야 할 인문학 고유의 역할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시대는 인공지능의 급속한 발전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심화 시대이다. 인공지능이 위기이면서 동시에 기회이기도 한 것은 이 실험적 지능과 학습을 통해 인간의 자연지능과 학습을 반추해 볼 상황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소수의 철학자들만이 물었던 덕, 정의, 용기, 자유 등의 가치와 중요한 사회적 행동들에 관해 이제 다수의 시민들이 함께 고민하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런 시대를 살고 있는 인문학도에게 묻고 싶다. 당신의 인문학은 무엇인가?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되묻기를 권한다. (13. 「디지털 시대 다시 인문학을 정의하라」 181~182쪽)

복잡한 감정 속에 숨겨진 순수한 감정을 찾는 기쁨이 문학작품을 읽는 이유 중 하나라고 한다면, 그리고 링기스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면, 문학 연구의 한 부분은 작품 속 인간에게서 동물을 끄집어내는 작업이라고 제안할 만하다. 이상한 제안이지만 사실 역으로는 항상 해 온 작업이다. 신화와 민담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문학은 끊임없이 의인화를 해 왔으니까 말이다. (…) 비록 근대에 와서 그런 의인화가 아동문학이나 판타지 혹은 우화에나 적합한 다소 유아적인 기법이라고 폄하받기도 하지만 여전히 문학에서 중요하다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다. 의인화가 그처럼 중요하다면 이제는 소위 ‘역의인화’의 중요성도 생각해 봐야 할 때가 아닐까? (14. 「문학과 동물: 인간중심주의의 해체」 185쪽)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경제 문제와 ‘환경’ 문제가 서로 대립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후자는 중요하기는 하지만 시급하지 않거나 이차적인 것으로, 또는 현실과 다소 동떨어진 이상주의적인 사고의 관심사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라투르가 잘 지적하고 있듯이, 기후 위기나 생물다양성 상실 등의 문제가 결코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이슈들과 동떨어진 단지 ‘생태적인’ 위기 또는 ‘환경’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특히 이 사실은 롭 닉슨이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에서 나타나는 ‘느린 폭력’의 여러 예들을 들면서 잘 보여주고 있으며, 이는 물론 글로벌 사우스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기후·생태 위기는 경제가 지속되면서도 ‘경제성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으리라는 가정이, 우리가 날마다 목도하는 사태들을 고려할 때 현실에 바탕을 두지 않은 비현실적인 생각에 가깝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22. 「왜 인류세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이 필요한가?」 307~308쪽)

쿤에 의하면 경쟁하는 상이한 두 과학은 상호 ‘공약불가능’하다. 어느 것이 우수한지, 객관적인지 판단할 수 있는 근거나 기준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 속에서 우수한 과학이 항상 승리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러한 쿤의 관점을 따르면 17세기 이후 동아시아라는 무대에서 만난 서구과학과 동아시아과학은 공약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서구과학이 동아시아과학보다 절대적으로 우수하다거나 객관적이라고 보는 편견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학인들이라면 서구과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을 것이라는 이해는 착각이다. 현대인의 눈에 서구과학이 우수하고, 전통과학이 뒤졌다고 보이지만, 당대 학인들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으리라는 이해 역시 편견이다. (28. 「이질적인 두 과학의 역사적인 만남」 396쪽)

법은 인문·사회의 모든 영역 중에서도 어쩌면 역사학자들이 가장 접근하기 힘든 분야일지 모른다. 법은 법학자들의 전문 영역이라는 인식이 오늘날 워낙 확고히 자리 잡고 있고, 또 본질적으로 법은 의심할 바 없는 명확한 규정, 고정불변의 원칙을 지향하기에, 여러 사회문화적, 정치경제적 맥락과의 연관 속에 다양한 해석을 제기하려는 역사학적 접근이 비집고 들어갈 여지가 적어 보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연방헌법은 더구나 1788년 비준된 후로 본문의 골격이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헌법’이기에, 다른 어떤 법 문서보다도 더 자명하고 영속적인 법적 가치를 대변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그러나 실제로 법이 만들어지고 해석, 적용되며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쳐 온 방식을 비판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히 미국 연방헌법처럼 고정불변의 것이라 여겨지는 텍스트일수록 오히려 더욱 역사화하여 새롭게 들여다보려 노력할 필요가 있다. (29. 「법을 역사화하다: 역사학의 비판적 통찰과 대안적 상상」 408쪽)

이렇게 많은 사상가들이 펼친 다양한 논의에 『돈 키호테』가 적절한 예로서 활용되어 온 것은 이 작품이 접근하기에 따라 수없이 많은 해석의 갈래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위대한 문학작품들이 그렇듯 『돈 키호테』도 궁극적으로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는가’, ‘인간은 사물을 어떻게 인식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다만 이러한 질문을 제기하는 방법도 다양하고 답도 하나로 수렴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돈 키호테』는 전형적으로 ‘열린 텍스트’, ‘대화적 텍스트’, ‘다성적 텍스트’이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론, 인식론, 예술적 재현의 문제, 글쓰기에 대한 성찰 등 다양한 주제와 연결된다. 『돈 키호테』의 의미는 여러 측면에서 이야기될 수 있고 어느 측면에서 접근되든 풍성한 논의 거리를 남긴다. (30. 「『돈 키호테』는 왜 위대한 작품인가?」 419쪽)

소설의 네러티브는 역사의 무게를 묵직하게 담아내고 있지만, 소설의 언어는 다양한 변주를 시도하며 때로는 비극적 현실을 위트 넘치는 가벼움으로 희화화하고, 공상과학의 세계만큼이나 불가해한 세계로 묘사한다. 실로, 디아즈의 언어적 실험은 역사를 다루는 방식만큼이나 독특하다. 기존의 표준영어를 도미니카 공화국식의 스페인어와 독특하게 조합한 스팽글리쉬(Spanglish)를 구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재기발랄하고 경쾌한 힙합문체와 진지하고도 학문적인 문체를 결합하면서 공상과학, 대중문화와 고급문화를 넘나들며 독자를 매우 이질적인 세계 사이로 숨이 찰 정도로 휘몰아 가며 도미니카 공화국의 끔찍한 역사부터 오스카의 우스꽝스럽고 처절한 너드(nerd)로서의 일상사까지 넘나든다. (33. 「오타쿠의 사랑 이야기: 주노 디아즈의 『오스카 와우의 짧고 놀라운 삶』」 461쪽)

최승우 기자 kantmania@naver.co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