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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례기
대대례기
  • 김재호
  • 승인 2024.02.11 00: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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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戴㯖 지음│林東錫 옮김│756쪽│삼호재

어린 시절 국민(초등)학교 다닐 때, 내 살던 산골은 순흥안씨 집성촌이었는데 친구 아버지는 방고개 비탈진 밭을 봄부터 참외밭으로 가꾸고 있었다. 그 고개를 넘어 다시 더 큰 놋재라는 고개를 넘어야 읍내 학교가 나타나는 등굣길이었다. 그때마다 친구 아버지는 나보다 일찍 그 밭에서 일을 하는 것을 보았고 점차 노란꽃이 피고 덩굴이 벋더니 달걀만 한 열매가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여름방학이 되자 참외는 익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친구 아버지는 지게에 조개발을 얹고 참외를 따서 짊어지고 먼 읍내로 향하였다.

그런데 한 이틀 지나 엄마를 통해 나에게 그 밭 원두막에 자며 지켜주면 좋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신이 났다. 숙제거리를 책 보따리에 싸서 갔다. 원두막이라는 것이 그것도 2층이라고 시원했고, 더구나 친구 아버지가 밥을 가지고 와서 밭둑 가 작은 도랑 찔레 덩굴 아래 옹달샘에 두고 참외를 팔러 고개를 넘는 것을 보고는 얼른 내려가 챙겨와 물에 말아 훌쩍훌쩍 주린 배를 채우곤 했다. 그 찔레 덩굴에 곁 바위더미에는 너구리 굴이 있었다고 했지만 난 무서움을 덜 타는 체질이었다. 

그보다 밤이면 이제껏 이 나이가 되도록 잊지 못하고 내 눈에 그대로 각인된 것이 있다. 바로 밤하늘이었다. 멀리 반딧불이 날고, 어둠이 깔려오면 그 어떤 불빛도 없는 곳이라 원두막에 누우면 하늘의 별이 쏟아진다. 북두칠성을 중심으로 자연책에서 배운 별자리, 카시오페이아자리, 오리온자리, 사자자리, 큰곰자리, 전갈자리 등 이름도 신기한 그 별무리를 찾아보려고 눕는 자세를 바꾸면서 맞추어 보았던 기억이 새롭다.

은하수는 너무 맑았고 견우직녀 이야기는 소년의 상상력에 소고삐를 잡고 하늘 밖으로 끝없이 유영(遊泳)해 갔다. 가끔 종횡으로 쏟아지는 별똥별은 또 어땠던가? 그러한 경험은 나에게 평생을 두고 꿈처럼 남아있다. 그 뒤 알퐁스 도데의 ≪별 이야기≫나, ≪알프스의 소녀≫,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별에 대한 표현은 언제나 내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그런데 잊고 살았던 그 ≪별 이야기≫가 이 ≪大戴禮記≫ <夏小正>편에 계절마다 거론되는 것이 아닌가? 물론 이는 문학적 표현도 아니고, 그렇다고 고대 별자리만을 다룬 전문적인 기록도 아니다. 그저 아주 먼 상고 하(夏)나라 때, 1년 열두 달, 농사와 계절별로 변하는 동식물의 출몰과 생태계의 신비함을 일상에 맞추어 기재한 것에 불과하다. 게다가 지금처럼 구체적이고 명확한 과학적 근거도 희박하다. 아울러 문학도의 호기심을 끌 만큼 서사성(스토리텔링)을 갖춘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나의 관심을 끈 것은 그 먼 하나라 때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궁금증에 별이라는 것이 스쳐가듯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일 뿐이다. 나는 늘 ‘별’이라는 말에는 연예계나 스포츠계, 혹 위력이나 위대한 업적의 ‘스타’라는 의미는 전혀 와 닿지 않고, 그야말로 어릴 때 보았던 하늘의 구체적이고 물리적, 천체의 ‘별’ 그 자체이며, 거기에 소년 시절이었다는 나이에 상흔(傷痕)처럼 남은 채 더 이상 발전을 하지 못하고 응고되어 정지해 있다. 

그래서 고향 유와려(酉蝸廬)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그 어떤 빛도 간섭이 없는 황정산(黃庭山) 원통암(圓通庵) 아래에 있어, 갈 때마다 별을 보리라는 기대에 흥분되어 찾아가곤 한다.

그리하여 이 <하소정>을 읽어보았지만 감도 잡을 수 없었고, 나아가 중국 고문에서 고어(古語) 중의 고어인 하나라 때의 어휘는 뜻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몇 번이나 포기하려다가 별 이야기만 나오면 다시 상상에 빠지곤 하여, 할 수 없이 여기까지 오고 말았다. 그 외의 다른 편(篇)의 기록도 녹록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별에 꽂힌 그 흥분과 어린 시절 그 꿈의 추억 때문에 결국 해내기는 하였다. 아마 사람마다 다름으로 해서 전혀 달리 느끼는 이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이 책은 그저 중국 고대 경서(經書)의 한 가닥이요, 고리타분한 ‘孔子曰’ 운운하는 고전일 뿐이다. 감동을 주는 책이 아니라 윤리 도덕을 따지고 치도와 덕치를 논하는 예(禮)의 곁다리이다. 

더구나 봉건시대 남존여비의 틀로 여인들을 숨도 쉬지 못하게 조여 묶었던 ‘삼종지례(三從之禮)’니 ‘칠거지악(七去之惡)’이 바로 이 책에 처음 실려 있기도 하니 비판도 없지 않은 책이다. 다만 연구와 공부에 고전은 취사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나아가 오히려 이를 통해 반면교사로 삼을 것도 찾아내어야 하기에, 자료로 제공하는 것이다. 

아울러 워낙 난해한 내용과 글자들이 많아 제대로 시원하게 밝혀내지 못한 부분도 너무 많을 것이다. 이 책을 대하는 자가 헤아려 주기 바란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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