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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서, 나는 말한다…그러므로 존재한다
지금, 여기서, 나는 말한다…그러므로 존재한다
  • 서종석
  • 승인 2024.03.04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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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말하다_『에밀 뱅베니스트』 서종석 지음 | 컴북스캠퍼스 | 128쪽

언어적 주체성 개념으로 변화하는 세상 보기
자기 지시적 정의로 기호적 권리 획득한 인간

에밀 뱅베니스트(1902∼1976)는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전반의 언어학과 인문과학의 발전을 이해하기 위한 중심 고리 중 하나이다. 그는 구조주의의 변방에 머물며 ‘담론’의 개념을 통해, 기호의 닫힌 세계를 벗어난 ‘언어적 주체’의 부상을 꿈꾸었다. 뱅베니스트에게 ‘언어 속 인간’의 심층적 양상은 공시적으로나 통시적으로 다양한 개별언어를 통해 천착하려는 일생의 연구목표였다.

뱅베니스트 언어학에서 인간은 무엇보다 언어 속에서, 언어에 의해 세계로 진입하고 그 세계에 머무르는 존재로 이해된다. 뱅베니스트를 소쉬르의 단순한 계승자나 혹은 ‘발화행위 이론’ 등 몇몇 제한된 이론의 틀에 가두어 두는 것은 매우 소극적인 읽기이다. 아울러 인간 사회의 변화와 더불어 인간 언어와 비인간 언어의 간의 관계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이때 뱅베니스트를 현재의 시간으로 소환해 독해하는 방식도 요구된다. 

이 책은 열 개의 키워드로 뱅베니스트의 이론을 해설하고 비평한다. 이 키워드는 뱅베니스트를 처음 접하는 독자들을 위한 길잡이로서 무엇보다 뱅베니스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선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이 뱅베니스트를 제한된 주제들로 한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이론에 대한 독자의 호기심을 더욱 불러일으켜 줄 것을 기대한다.

이 책은 뱅베니스트의 『일반 언어학의 여러 문제』 1권과 2권의 주요 내용을 ‘주체성’, ‘해석’, ‘담론’, ‘시간’, ‘동물의 언어’ 등의 키워드로 살펴본다. 키워드 ‘문자’의 문제는 뱅베니스트의 유고집 『마지막 강의: 콜레주드프랑스 1968∼1969』의 핵심 내용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주체의 문제를 중심에 놓고 뱅베니스트를 읽고 이해하려는 필자의 의도를 담고 있음을 밝힌다. 이는 오늘의 시각에서 뱅베니스트를 어떻게 제시할까 고민하고 내린 필자의 ‘주체적’ 결정이기도 하다. 

주체의 개념은 철학에서 온 것이지만, 뱅베니스트의 주체는 순수히 언어적이다. “‘나’는 ‘나’라고 말하는 자다.” 뱅베니스트의 이러한 정의는 기독교 구약 성경 「출애굽기」 3장 14절과 거의 유사한 특성을 보인다. 즉 “Ehyeh ascher ehyeh”, 곧 ‘나는 있는 나다(Je suis celui qui suis)’. 인간이라는 ‘말하는 주체’는 이러한 자기 지시적 정의를 통해서 그 어느 때보다도 엄청난 기호적 권리를 획득한 것이다. 키워드 ‘말하는 인간’, ‘말하는 주체’, ‘상호 주체성’, ‘담론’, ‘포스트휴먼, 언어, 주체’ 등은 이러한 주체의 개념을 직간접으로 다루는 것들이다. 

특히 마지막 키워드 ‘포스트휴먼, 언어, 주체’는 키워드 ‘동물의 언어’와 함께, 포스트휴머니즘 시대에 인간중심주의와 인간·비인간 관계에 대한 짧은 성찰의 장이다. 언어는 지금까지 ‘인간다움’으로 칭송된 다양한 가치 중 단연 으뜸이었다. 과학으로서 언어학은 인간의 언어를 다루는 학문으로 새로운 흐름에 가장 저항적인 영역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이 책은 뱅베니스트의 ‘언어적 주체성’의 개념을 붙잡고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과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 무엇인지 독자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젊은 시절 뱅베니스트는 혁명적이고 전위적인 사상가들과의 교류하며 기존 사회 질서에 대한 변혁을 부르짖던 지식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초현실주의 운동으로 이어진 기존 관념과 순응주의에 대한 그의 저항 정신은 그의 학문적 작업에 그 흔적을 남겼다. 뱅베니스트는 유대인으로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고초를 겪었고, 말년에는 오랜 기간 병마와 싸우며 힘든 삶을 살았다. 뱅베니스트는 평생 독신으로 살고 언어학자로 세상을 떠났다. 

뱅베니스트의 업적은 방대하지만 미완성 상태다. 그리고 그가 남긴 수많은 미완성 자료들 속에서 뱅베니스트의 이론을 찾는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최근에는 그가 남긴 수많은 자료들 속에서 뱅베니스트가 ‘시학(poétique)’, 즉 문학을 포괄하는 폭넓은 언어학을 구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기도 한다. 

그간 단속적으로 뱅베니스트의 언어 이론에 대한 논문들이 발표되었으나, 국내 관련 연구는 사실상 거의 황무지나 다름없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지금까지 뱅베니스트의 주요 저작에 대한 번역서들이 지속적으로 출판되어 왔다는 점이고, 또 작년 2023년 처음으로, 비록 소규모이긴 했으나 뱅베니스트를 주제로 학술대회가 열렸다는 것이다. 이 작은 책이 뱅베니스트를 찾는 일반 독자들의 지적 호기심을 더욱 키우고, 국내에서 뱅베니스트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해 본다.

 

 

서종석
한국외대 언어연구소 소장·프랑스문화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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