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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에서의 바람직한 태도
홍대에서의 바람직한 태도
  • 최승우
  • 승인 2024.02.21 11: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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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언 지음|(주)도서출판 강|332쪽

김도언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주로 시인이나 소설가들)에서 발견되는 ‘권태’는 “열정이나 욕망을 유예시키는 어떤 필연적인 상태”(「권태주의자 내편」, 10쪽)로 규정된다. 심지어 그들은 “발견하고 표현된 나 자신을 끊임없이 부정하고 지워서 권태주의자가 되는 것이 나의 문학적 소명”(「권태주의자 내편」, 18~19쪽)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권태는 ‘어떤 일이나 상태에 시들해져서 생기는 게으름이나 싫증’이라는 사전적 의미와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권태를 현대 사회의 일반적인 도덕적-정신적 쇠퇴와 도시 생활의 결과로 간주한 보들레르의 관점이나 “권태는 좌절감의 다른 이름”(수전 손택)이라는 부정적 관점 역시 이 작가의 ‘바람직한 태도’로서의 ‘무관심’과 그 결과물로서의 ‘권태’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권태주의자 내편」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발언을 참조하기로 하자.

“권태에 대해 오래 생각하고 관찰하는 동안 나는 사람이 가장 권태롭게 보이는 순간이 시각적인 이미지의 이데아에서 자기 자신을 해방시킬 때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외부의 시선을 모두 거두어버릴 때, 그리고 그 안에 자신의 정조를 조용히 불러들일 때 권태가 완성된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러니 이 권태는 ‘외부의 시선을 모두 거두어’ 오로지 ‘그 안에 자신의 정조를 조용히 불러들일 때’ 완성되는, 철저하게 근원적인 내면의식 혹은 ‘자(기)의식’으로부터 발생한다는 것이다.

김도언의 작품 세계에서 권태가 이러한 근원적인 내면의식 혹은 자의식으로부터 발생한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갖는다. 사실상 『홍대에서의 바람직한 태도』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화자나 주인공들은 ‘자의식’으로 충만한 ‘소외의 추종자’들이다. 그 인물들(사실상 한 인물의 변용이겠지만)의 시선과 행위 속에서 우리가 또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작가의 세계관 혹은 문학적 태도이다. 김도언의 작품 세계가 전반적으로 ‘사소설적 경향’을 띠는 이유도 이러한 태도와 무관하지 않다. “자신의 실제 이야기에 서사를 기대는 것, 편의상 그것을 사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사소설을 위한 몇 장의 음화」, 103~104쪽), 소설 속의 인물 소설가 K의 문학적 관점을 우리는 또한 소설가 김도언의 관점으로 유추해 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액자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또 다른 소설 「아만다와 레베카와 소설가」라는 작품에서 액자 속의 이야기로 등장하는 ‘홍대에서의 바람직한 태도’의 작가 K는 아래와 같이 고백하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액자 속 소설의 이야기를 넘어서 또한 실재하는 김도언이라는 소설가가 쓴 개별 작품으로서 「홍대에서의 바람직한 태도」에 대한 작가 자신의 기획과 의도를 포함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거기에서 더 나아가, 내가 이해하기로는, 『홍대에서의 바람직한 태도』라는 소설집 전체에 대한(그러므로 작가 자신의 문학 세계 전반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로 읽히기도 한다.

소설의 서사가 요구하는 요소들, 이를테면 멋진 인물과 극적인 사건과 아름다운 배경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없는 단조롭기 짝이 없는 그 작품은, 어느 날 ‘권태’가 내게 도래한 이후 내가 느낀 이 세계의 참을 수 없는 즉물성과 공허함을 표현하기 위해 쓴 것이다.(「아만다와 레베카와 소설가」, 144~145쪽)

“이 세계의 참을 수 없는 즉물성과 공허함”은, 그 즉물성과 공허함을 직시하는 작가의 ‘무관심한 (관조의) 태도’는 ‘권태’와 필연적으로 연관된다는 점을 강조하기로 하자. 위의 인용에서는 ‘권태’가 이 세계의 공허함에 대한 인식의 선결 조건으로 전제되어 있지만, 사실상 권태는 ‘무관심성’이라는 ‘(미적) 태도’로 직관(직시/관조)한 이 세계의 공허함에 대한 인식의 결과물이다. 공허감이 권태의 모태이지, 그 역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홍대에서의 바람직한 태도』는 이 세계의 무의미함을 직관/관조하는 한 ‘권태주의자’의 내면의식 혹은 자의식이라는 심리적 풍경에 대한 기록으로 자리한다. 그 뿌리에는 아마도 실존에 대한 부조리의 의식이 똬리 틀고 있는 것 같다.

시인이자 작가로서 김도언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기독교적 원죄 의식과 구원(유토피아)의 문제인 것처럼도 보인다. 다시 말해 원죄로 인한 실낙원 이후의 구원과 새로운 유토피아에 대한 희망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문제는 김도언의 작품 세계를 근원적으로 관통하는 문제의식이라는 뜻이겠다.

미적 유토피아의 꿈은 또한 혁명 의식의 산물이다. 모든 이데올로기론들로부터 온갖 비판과 비난을 감수하게 만드는 작가의 이 특정한 ‘혁명의 이데올로기/미학주의’는, 역으로, 또한 모든 이데올로기론들에 대한 치명적인 저항과 반동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나는 문학이 사회와 세계를 개조하거나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아만다와 레베카와 소설가」, 149쪽)라는 소설 속 한 인물의 믿음은 곧바로 작가의 믿음으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유토피아적 혁명의 욕망을 갖는다. 비록 그 욕망이 욕망을 넘어서려는 욕망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무엇보다도 모든 이데올로기는 특정한 욕망의 서사들이다. 그리고 미적 유토피아는 그 욕망/탈욕망의 경계에서 ‘저 너머’를 꿈꾼다.

미학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욕망과 정치의 출현은 필연적이다. 미학과 정치는 욕망을 사이에 놓고 대립하는 가장 치명적인 짝패 관계를 이룬다. 정치적-도덕적 이해(利害)와 욕망을 적극적으로 관철하고자 하는 욕망의 정치학과 그 이해와 욕망으로부터 해방을 성취하려는 (반)욕망의 미학이 형성하는 이 전선은 무관심이라는 ‘미적 태도’를 올곧게 견지하려는 작가에게는 불가피한 것이다.

미(학)적 태도를 견지하려는 김도언의 문학 세계에서 그러므로 정치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사유와 발언은 회피할 수 있는 것이거나 선택 가능한 것이 아니다. 하나는 언제나 다른 하나를 배경으로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능한 세계를 욕망하는 정치와 불가능한 세계를 꿈꾸는 미학은 그렇게 서로를 요구한다. 그 긴장과 길항의 영역이 작가가 활동하는 공간이다.

추천의 말

김도언의 소설은 ‘권태주의자’의 좌표에서 쓰인다. 김도언의 ‘권태주의’는 끝없이 자신을 지우면서 모호함과 무신념, 판단 정지를 살아가고자 한다. 자칫 허무나 무심한 위악을 앞세우는 듯하지만, 섬세하고 예민한 촉수가 향하고 있는 곳은 언제나 자기 자신이다. 그것은 가혹할 정도의 정확성, 엄격함, 정신적 기품을 스스로에게 요구한다. 권태주의자의 언어는 역설과 아이러니 안에서만 가까스로 균형을 취하면서 강요된 세계의 깊이와 맞선다. 그렇게 해서 권태주의자의 텅 빈 언어가 세계의 투명한 표면을 기록해나가기 시작할 때 자유는 선물처럼 발생한다. 『홍대에서의 바람직한 태도』를 읽는 일은 그 자유의 향유가 될 것이다.  정홍수 문학평론가

작가 소개

김도언

199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간 펴낸 책으로 소설집 『철제계단이 있는 천변풍경』 『악취미들』 『랑의 사태』, 장편소설 『이토록 사소한 멜랑꼴리』 『꺼져라 비둘기』, 경장편소설 『미치지 않고서야』 등이 있다. 2012년 계간 『시인세계』 신인상을 받으며 시작 활동을 병행했고 시집 『권태주의자』와 『가능한 토마토와 불가능한 토요일』을 펴냈다. 이 밖에 동시대 시인들과의 대담을 묶은 인터뷰집 『세속도시의 시인들』과 산문집 『불안의 황홀』 『소설가의 변명』, 성인 동화집 『코끼리 조련사와의 하룻밤』 등을 묶었다. 현대인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욕망의 전개와 진화, 윤리와의 상호 관계를 관찰하는 데 각별한 관심이 있다.

최승우 기자 kantmani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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