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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척의 배
천 척의 배
  • 김재호
  • 승인 2024.03.05 22: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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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탈리 헤인스 지음 | 홍한별 옮김 | 돌고래 | 416쪽

아마존(고대 역사 소설 부문) 베스트·스테디셀러
NPR, 《가디언》, 《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먼트》 선정 2021 최고의 책
2020 여성 문학상 최종 후보

서양 문화의 가장 유구하고도 저명한 이야기
온전히 여성의 시각에서 새롭게 쓴 트로이아 전쟁

“한두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야. 모든 여자들의 이야기지.”

『천 척의 배』는 고대 신화를 여성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흐름의 정점에 있는 작품이다. 최근 몇 년 새 『키르케』(매들린 밀러), 『침묵은 여자가 되나니』(팻 바커) 등 호메로스 서사시의 남성 중심적 시각을 탈피한 소설들이 한국에서도 큰 사랑을 받았는데, 『천 척의 배』는 이 두 작품과 동일한 맥락에 있으면서도 트로이아 전쟁 전반의 이야기를 망라해 다룬다는 점에서 남다른 야심이 돋보인다.

소설은 묻는다. 우리는 만화로 각색된 그리스 신화 등을 통해 트로이아 전쟁을 제법 친숙하게 여기지만, 무려 10년간 이어진 이 참혹한 장기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것이 정녕 남성 전사들뿐이었을까?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딧세이아』는 흔히 서구 문학의 효시이자 ‘전쟁과 전사, 남성과 남성성의 토대를 닦은 위대한 텍스트’로 여겨진다. 이런 평가가 전적으로 부당한 것은 아니나 『천 척의 배』는 지금껏 트로이아 전쟁에 관한 이야기에서 다뤄지지 않은 여성 캐릭터들의 영웅성과 서사성에 주목해 이 전쟁의 진정한 참상을 낱낱이 그려 낸다.

『천 척의 배』의 가장 큰 미덕은 서양 고전을 전공한 저자가 트로이아 전쟁을 ‘여자의 얼굴’로 다시 쓰기 위해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할 뿐 아니라 실존하는 고대 그리스 문헌을 일일이 손수 들추고 살폈다는 점이다.

저자 나탈리 헤인스는 호메로스·오비디우스·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에우리피데스·아이스킬로스의 비극, 나아가 고대 그리스 연극 및 서정시 등에서 고대 그리스 및 트로이아 여성들의 삶의 편린을 샅샅이 들추고 그러모은다.

그러고는 이들 원전을 총체적으로 참조하고 재해석해, 기존 문헌에서는 불과 한두 줄의 문장으로 찰나의 섬광처럼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여성 캐릭터들에게 생동감 넘치는 목소리와 성격을 부여한다. 이렇듯 『천 척의 배』는 다른 세계로의 몰입을 유발하는 참신한 해석과 흥미로운 전개를 통해 그리스 신화에 익숙한 독자와 낯선 독자 모두를 열정적으로 매혹한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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