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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계 여성 이방인, 다양성과 공존을 꿈꾸다
유대계 여성 이방인, 다양성과 공존을 꿈꾸다
  • 정채연
  • 승인 2024.03.22 10: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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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말하다_『세일라 벤하비브』 정채연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130쪽

세계주의와 다문화주의 이론·실천 간 간극
중첩적 정체성과 현대 서구 정치철학 분석

세계화와 지역화가 전방위에 펼쳐지던 2000년대 초는 다양성과 이질성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도록 하는 정신적 태도, 즉 관용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요청되던 시대였다. 특히 ‘참여’는 그 시대를 관통하는 키워드였고, 시민운동과 시민단체가 급속히 성장하면서 이전에 주변부로 비켜서 있었던 다양한 주장들이 정치 공론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필자가 학생회장으로 출마하면서 선본 이름을 ‘톨레랑스(tolérance)―다양한 생각이 존중받는 공동체’로 고심해 정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후 대학원에 진학해 학제 간 연구로서 법인류학을 접하게 됐고, 법에서 다원주의를 수용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이론과 실천을 연구 주제로 삼았다. 학부 시절의 단편적인 고민과 문제의식을 필자의 학문세계 안으로 끌어온 셈이다. 

이렇듯 법다원주의, 다문화주의, 관용 그리고 세계주의는 필자가 기초법학자로 성장해 온 과정에서 대표적인 주제어가 됐다. 그간 이루어진 일련의 연구들은 법인류학적 다원주의의 관점에서 현대사회의 관용론을 재구성하고, 다문화사회의 사회통합과 탈민족 시대의 세계주의를 구상하는 데 중점을 둬 왔다. 이때 필자가 주되게 다뤄 온 학자들은 하버마스와 데리다였고, 칸트 계몽철학의 유산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계승한 이들의 사상을 변증적으로 관련짓고자 했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변증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반성적 모더니즘’을 지향하는 필자의 철학적 관점을 정립하는 데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줬다. 

이렇듯 변증적 사유에 바탕을 두고 세계주의와 다문화주의를 구상하고자 하는 여정에서 필자가 만나게 된 학자가 바로 세일라 벤하비브 전 미국 예일대 교수이다. 현대 서구사회의 정치철학 담론을 이끄는 벤하비브는 튀르키예 태생의 유대인 혈통으로, 유대계 여성 이방인이라는 다양하고 중첩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개인적 배경은 그녀의 학문세계와도 밀접하게 관련돼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책은 벤하비브의 정치철학에서 가장 기본적인 사상적 줄기를 다문화주의와 세계주의로 보고 그녀의 핵심적인 이론·개념·관점을 해설한다. 

구체적으로 다문화주의 이론이 기초해야 할 문화 관념인 ‘비본질주의적 문화’, 보편주의적 규범과 문화적 다양성이 양립할 수 있게 하는 ‘숙의 민주적 모델’, 세계주의적 규범이 다양한 공동체 안에서 변증적으로 수용되도록 하는 ‘민주적 반추’, 정치공동체의 성원과 비성원, 곧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기존의 경계가 민주적 대화 절차를 통해 재정립될 가능성을 열어 놓는 ‘국경의 다공성’ 등 벤하비브의 사상을 구성하는 열 가지 키워드를 제시한다.

특히 벤하비브의 학문적 여정을 따라가면서 칸트, 아렌트, 하버마스, 데리다, 커버, 테일러 등 또 다른 대표적인 사상가들과 조우하게 되는 것 역시 독자에게 지적 흥미를 제공해 줄 것이다. 벤하비브는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철학·사회학·언어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을 자신의 학문 세계로 초대하고, 이들의 논의를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재해석하고 발전적으로 계승하면서 독자적 관점을 정립하고자 한다. 여기에서도 변증적 사유에 정초해 있는 벤하비브의 학문적 개성을 확인할 수 있다.

문화적 다양성과 혼종성이 점차 심화하고, 민족성·종교·인종·언어 등 개별 특수한 정체성 간의 긴장과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은 세계주의와 다문화주의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진지하게 요청한다. 21세기 초 이루어진 벤하비브의 세계사회와 다문화사회 진단은 오늘날 여전히 유효할 뿐 아니라 지난 20여 년 동안 점점 더 심화했다고 볼 수 있다. 

근대적 국민국가의 다문화현상과 사회통합 그리고 세계시민사회의 보편적 인권과 시민적 주권의 변증을 아우르는 벤하비브의 정치철학은 세계주의와 다문화주의 이론과 실천 간의 간극을 메우고 바람직한 정책 방향성을 제시하는 데 중요한 사상적 기초가 될 것이다.

 

 

 

정채연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대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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