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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믿는 게 참된 믿음”...김상봉 교수의 ‘영성 없는 진보’
“믿음을 믿는 게 참된 믿음”...김상봉 교수의 ‘영성 없는 진보’
  • 김재호
  • 승인 2024.03.18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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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_『영성 없는 진보』 김상봉 지음 | 온뜰 | 140쪽

“믿음을 믿는 것, 그것이 참된 믿음일 것이다.” 김상봉 전남대 교수(철학과)의 작은 책 『영성 없는 진보』이 4월 총선을 앞두고 큰 울림을 준다. 절망의 정치를 넘어 새로운 길을 열어가기 위해 믿음을 회복하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김 교수는 이전투구의 장이 돼버린 정치를 철학적으로 비판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대안을 찾고자 고군분투한다. 그래서 그는 “차이를 적대적 분열과 대립이 아니라 건설적 협동이 되게 하는 것은 전체에 대한 믿음”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의 정치, 특히 민주주의의 위기는 두 가지 지점에서 확인된다. 첫째, 자기형성의 실패다. 진보 진영은 엄혹한 시대에서 권력에 맞서 정권을 창출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악마를 좇다가 스스로 악마가 된 것’은 아닐까. 타자의 부정과 비판에만 매몰된 진보 정치는 권력 획득에 휩싸이면서 자신을 잃어버렸다. 그 토대가 되는 영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영성은 ”나와 전체가 하나라는 믿음을 의미“한다. 그러한 믿음이 병들어버렸다는 진단이다.  

둘째, 역사의식의 부재다. 역사를 믿는다는 건 영원을 산다는 뜻이다.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가 아니라 믿음의 시간이자 특별한 시간인 ‘카이로스’를 꿈꿔야 한다. 크로노스에 집착하면 어제-오늘-내일의 연속성을 깨닫지 못하고 순간만 살 수 있다. 인간은 영원히 기억되고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기에 어제를 반성하고 오늘에 집중하며 내일을 꿈꿀 수 있다. “역사의 의미를 묻고 생각하는 것은 이성에 반대해서 비이성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멈추는 곳에서 더 멀리 나아가는 것, 아니 더 높이 올라가는 것이다.”

역사의식이 없으면 반성도, 내일에 대한 희망도 사라진다. “이 말이 상투적 수사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참된 믿음이란 역사에 대한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의 의미를 묻고 생각하는 것은 이성에 반대해서 비이성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멈추는 곳에서 더 멀리 나아가는 것, 아니 더 높이 올라가는 것이다.”

 

역사의식과 자기 동일성 원리...만남의 과제·전제

역사의식이 중요한 건 자기 동일성 원리 때문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은 나라는 의식이 없는 곳에서는 생각이 일어날 수 없다.” 이는 모든 사유의 첫 번째 원리다. 사유는 이성에 의해 작동한다. 이성으로 우리는 각자가 자신과 타인을 인식할 수 있다. 이로써 고립된 인간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 인간이 세계를 인식한다는 건 ‘만남’을 통해서다. “주체는 타자적 주체와의 만남 속에서 주체가 된다.” 김 교수는 “만남은 과제이기도 하고 전제이기도 하다”라며 “만남의 총체로서 세계 역시 마찬가지로 전제이면서 과제”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믿음은 이성의 차원이 아니다. 아무리 분석하고 타인을 만난다 하더라도 내 안의 중심이 잡혀있지 않으면 도루묵이다. 모든 성현이 하시는 말씀과 비슷하다. 인간은 이성의 세계에서만 살지 않는다. 그래서 영성의 차원이 필요하다. 믿음을 믿을 수 있는 참된 믿음은 이성의 영역이 아니다. 크로노스가 이성의 차원이라면, 카이로스는 영성의 차원이다. 정치는 이성으로만 작동되지 않는다. 믿음의 정치는 더욱 그러하다. “믿음이야말로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72쪽)(히브리서 11장 1절), “네 원수를 사랑하라”(마태복음 5장 44절),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오”(마태복음 5장 46절). 예를 들어, 동학 농민 혁명과 3·1운동 등은 종교적 차원에서 촉발된 정치였다. 

4월 총선이 본격화하면서 온갖 잡설이 난무한다. 분명한 건 이번 선거가 새로운 길을 여는 희망의 정치가 돼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김 교수의 지적을 되새겨야 한다. “집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망치만 있으면 된다. 그러나 새 집을 짓기 위해서는 설계도가 있어야 한다. 파괴하기 위해서는 파괴하려는 의지만 있으면 된다. 그러나 건설은 파괴와는 전혀 다른 지혜를 요구한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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