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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종말의 시대, ‘철학의 역할’을 묻는다
철학 종말의 시대, ‘철학의 역할’을 묻는다
  • 이기상
  • 승인 2024.03.25 08: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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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존재’를 묻다_『세계철학사 4 : 탈근대 사유의 지평들』(이정우 지음 | 도서출판 길 | 752쪽)를 읽고
우리말로 쓰인 첫 ‘세계철학사’ 완간

대한민국 철학계는 이 책으로 한 단계 높은 
세계철학계의 수준으로 도약하게 됐다. 
이 교수의 노력에 깊은 경의를 표한다. 
바라건대 곧 프랑스어로 번역·출간되기를 기대한다.

우선 이 책을 읽고 느낀 전반적인 감상을 짤막하게 요약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현대철학사를 큰 맥락, 큰 판에서 세 축으로 구분해서 다루고 있는 것이 참신했다. 언어문법의 표현을 빌려 1인칭·2인칭·3인칭으로 대별했다. 

1인칭은 바로 ‘나’를 둘러싼 철학적 체계화들이다. 2인칭은 ‘너’라고 지칭될 수 있는 온갖 타자화의 문제들과 그와 연관된 담론들과 그 해결의 모색들이다. 그다음 3인칭은 큰 맥락에서 ‘그것’이라 분류될 수 있는 온갖 전체들, 즉 신·우주·자연·세계·생명 등이다. 

이러한 대별 자체가 벌써 색다르며 획기적이다. ‘탈근대 사유의 지평들’이라는 제목에 어울리는 시각이다. 더욱이 20세기는 소위 ‘언어론적 전환’이 펼쳐지고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세기 아니었던가.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관통하며 관류하고 있는 ‘시대정신’으로서의(물론 저자는 시대정신을 버리고 ‘사건’을 택한다.) 20∼21세기의 세기적 생활세계 심층문법은 무엇인가.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것은 ‘차이생성의 사건’이다.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의 ‘고원’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펼쳐지고 있는 온갖 종류의 차이들이 용솟음치며 새로운 ‘개별체(그것)들’과 그것 모두를 아울러 온갖 변혁과 변화의 물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 다양한 지평(존재자, 존재)들의 장(마당)을 이 책은 다룬다. 

이정우 경희사이버대 교수는 『세계철학사』 전4권을 완간했다. 각 각의 부제는 ‘지중해세계의 철학’, ‘아시아세계의 철학’, ‘근대성의 카르토그라피’, ‘탈근대 사유의 지평들’이다. 사진=도서출판 길

 

‘존재’를 둘러싼 사유자들의 싸움

이제 여기에 평생 철학을 해온 한 사람으로서 나름 서평자가 소화시킨 한걸음 물러선 평을 해보겠다. 우리가 사는 21세기의 분명한 시대 징표의 하나는 ‘철학의 죽음’이다. 예전과 같은 형이상학으로서의 철학은 종말을 맞이했다. ‘∼학’으로서의 철학은 자신의 자리가 없음을 스스로 인정한다. 그래서 ‘사유’라는 이름을 택한다. 저자인 이정우 경희사이버대 교수도 그래서 우리가 서있는 21세기 철학을 역사적으로 되돌아보며 근대와 구별되는 탈근대라고 지칭하면서 ‘탈근대 사유의 지평들’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존재(있음)’의 의미에 대한 논쟁이 중요한 사유의 주제였음을 인정한다. 그것을 표현하는 다양한 이름들이 등장한다. 그 대표적인 개념이 ‘사건학’이다. 

사건학이라는 개념을 떠올릴 때 빼놓을 수 없는 철학자가 마르틴 하이데거이다. 그런데 이 교수에게 사건학의 주인공은 하이데거가 아니다. 왜냐하면 저자는 오히려 ‘존재-사건’보다는 그 반대급부인 ‘시뮬라크르(실제 존재하지 않는 인공물)’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비-존재-사건’에 대해 더 관심을 쏟고 있기 때문이다. 

사건에 대한 독일어는 Ereignis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강조하는 ‘사건’에 대한 프랑스어는 affaire, événement, incident, cas 등이다. 이 교수가 내세울 수 있는 다양한 의미들도 이 프랑스어와 연관이 있다. 하이데거의 ‘사건’이 근원과 연관이 있고 그래서 그는 그리스철학에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그 말놀이도 그리스어와 독일어로 펼쳐지고 있다. 이 교수의 합리적인 ‘사건’ 풀이는 변화와 ‘비-존재’에 관심을 둔 스토아학파의 계보를 잇는다. 그것은 로마문화권에로 전수돼 프랑스의 합리론에 깊은 족적을 각인한다. 라틴계인 프랑스어의 말놀이는 이쪽 계열의 ‘사건학’과 깊이 연관된다. 그것이 들뢰즈와 가타리, 라캉과 바디우, 미셸 푸코와 데리다로 이어져 내려온다.

장 보드리야르(1929∼2007)는 프랑스 철학자로서 미디어 이론 을 통해 ‘시뮬라크르’ 개념을 강조했다. 시뮬라크르는 실제로 존재 하지 않지만 만들어낸 가상의 인공물을 뜻한다. 사진=위키백과

 

하이데거의 어깨 위에 올라탄 철학자들

평자는 이 교수의 ‘탈근대 사유의 세계철학사’에서 거인 하이데거의 어깨 위에 올라탄 들뢰즈·가타리·바디우·데리다를 보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한 축인 ‘시간’에 대한 풀이에서는 베르그송의 생명철학을 사건학과 접목시킨 ‘차이생성의 사건학’을 보았다. 탈근대 사유의 세계철학을 견인하고 있는 것은 ‘탈구축의 프랑스철학’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프랑스 지성계에서는 환호성을 외치며 축제의 팡파르를 세상이 떠나가도록 울릴 것으로 보인다. “이제 드디어 우리의 콤플렉스인 3H(헤겔, 후설, 하이데거)를 극복하였다!”고.

어쨌거나 동아시아 한반도의 한 철학자가 지난 100년 동안 온 프랑스의 지식인들이 다 대들어서도 못해낸 세기적 과업을 드디어 해낸 것이다. 그야말로 세계철학사에 기록될 만한 일이다. 이 평은 농담 삼아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정말로 프랑스 지성계가 프랑스 민족성인 합리성을 다 동원해서도 만족스럽게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지 못한 것을 대한민국의 철학자 이정우 교수가 해낸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이 책은 세계철학사적인 업적으로 높이 평가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성취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평자는 잘 알고 있다. 같은 시대에 한국철학계에서 연구하고 발표하고 저술하며 지내온 동료로서 이 교수를 잘 알고 있는 셈이다. 그의 예전 저서들은 빼놓지 않고 사서 열심히 읽었다. 항상 저자가 자기 것으로 소화해서 짜임새있게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쉬운 글로 다듬어 책으로 출간해내는 것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던 터였다. 

 

경직된 대학강단 떠난 자유의 철학자

학계의 경직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대학강단을 떠났을 때 몹시 아쉬워했다. 그런데 그는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일반 대중과 소통하는 철학인으로서 거듭나 한국철학계를 혁신해 나갔다. 철학아카데미를 만들어 살아있는 철학에 굶주린 지식인들을 위한 강의를 하면서 강의록들을 속속 출간했다. 자기 것으로 완전히 소화시킨 내용들을 일반인들이 알아듣기 쉬운 우리말로 풀어서 책으로 출간하니 그것이 곧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한 철학하기 아니겠는가! 

『세계철학사 1』(길 | 2011)과 『개념-뿌리들』(그린비 | 2012)을 출간했을 때 평자가 철학인으로서 평생 출간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책들을 저서로서 출판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이 교수의 노고에 마음으로나마 깊이 감사했다. 그러다 올해 이 교수는 오랜 숙원인 『세계철학사』 전4권을 출간해냈다. 이것은 전 세계를 통틀어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이다. 

책을 안 읽고 짤막한 동영상에 빠져 재미를 모든 것의 척도로 평가하고 있는 요즘 세대의 사람들에게 3천 쪽이 넘는 대작은 읽을 엄두도 못 낼 거대한 산이다. 오르지 못할 산, 먹지 못할 나무 위 과일을 폄하라도 하고 보자는 나쁜 심보를 가진 사람들도 더러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평자가 먼저 자원해서 책 서평을 신청했다. 꼼꼼하게 밑줄 쳐가며 3주에 걸쳐 완독을 했다. 

평자가 읽어본 그 수많은 온갖 종류의 철학사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최고의 철학사다. 그것도 그냥 철학사가 아니라 ‘세계철학사’다. 철학 전반에 대한 큰 그림을 얻고 싶어하는 사람, 어떤 철학을 공부해야 할지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길잡이 필독서가 하나 출간된 셈이다. 대한민국 철학계는 이 책으로 한 단계 높은 세계철학계의 수준으로 도약하게 됐다. 이 교수의 노력에 깊은 경의를 표한다. 바라건대 곧 프랑스어로 번역·출간되기를 기대한다.

 

이기상
한국외대 명예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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