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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가 포퓰리즘의 대안이 아니라면
자유주의가 포퓰리즘의 대안이 아니라면
  • 이관후
  • 승인 2024.03.28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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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 비평_『자유주의 이전의 민주주의』 조사이아 오버 지음 | 노경호 옮김 | 후마니타스 | 448쪽

포퓰리즘은 신자유주의의 과잉이 낳은 부작용
자유주의의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 낳은 문제

포퓰리즘이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포퓰리즘은 20세기 전후에 미국과 러시아에서 나타난 농민 운동과 1960년대 이후 남미 등 일부 저발전 국가들에서 나타난 국민동원의 한 방식으로 이해되었을 뿐, 21세기에 유럽이나 민주주의가 발전한 국가들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리라고 예상된 정치적 현상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미국의 비판적 지식인이자 저명한 정치학자인 셸던 월린은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기인 2008년에 미국에서 출간된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까?』에서 제국주의를 지향하는 미국 정치의 변화를 ‘전도된 전체주의’이라며 경계했다. 

월린은 미국의 슈퍼 파워와 제국 지향이 기업의 사회적 통제 강화와 군사력을 통한 우파 제국주의로 나타날 것이며, 오바마와 같은 비주류 대통령이 이러한 슈퍼 파워의 작동을 자제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내비쳤다. 그러나 공화당의 부시 대통령이 지향하던 슈퍼 파워와 제국주의에 반기를 든 것은 도널드 트럼프였다. 중도적 리버럴이 아니라 극우적 포퓰리스트가 오히려 슈퍼 파워를 제지한 것이다.

포퓰리즘은 이처럼 예상치 못한 정치적 현상이었다. 그런데 포퓰리즘의 반엘리트주의적 경향이나 사상, 이념 그 자체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인민주권과 민주주의 산물이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표들이 피대표자들의 이익이나 의사와 별개로 정치적 행위를 지속할 경우, 헌정 체제에서 합법적으로 주권을 소유한 인민들은 ‘예외 상태’를 가정하는 상태에서 기존의 기득권에 대한 적대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의 한 산물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의 반민주적·반정치적 성격이 용인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왜 민주주의에서 태어난 포퓰리즘이 이런 성격을 갖게 되는 것일까. 많은 학자는 그 해답을 포퓰리즘과 자유주의와의 관계에서 찾고 있는 듯하다. 이에 대해서는 크게 2가지의 흐름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포퓰리즘이 (신)자유주의의 과잉이 낳은 부작용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가장 큰 흐름의 시원은 아마도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이고, 그 현실적 증거는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포퓰리즘이란 오히려 (정치적) 자유주의의 결핍에서 나타난 산물이라는 관점이다. 포퓰리즘을 기존의 이데올로기적 지평에서 이해하는 가장 유력한 해석 중 하나는 그것을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로 이해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에서 견제와 균형, 언론의 자유, 법치주의, 공화주의 등의 자유주의적 요소가 모두 사라지면 그 결과는 포퓰리즘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대안은 자유주의의 복원일까.

이에 대한 반론 중 하나는 패트릭 J. 드닌이 『왜 자유주의는 실패했는가』에서 제기한 바 있다. 드니는 포퓰리즘을 포함한 오늘날의 많은 문제들이 자유주의의 실패가 아니라 성공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자유주의는 현대 자본주의에서 ‘개인’들의 자유를 보호하고자 했지만, 이 개인들의 자유는 결국 국가의 힘에 의존해서 보호될 수밖에 없는 딜레마를 안고 있다. 그 과정에서 국가는 문화와 관습, 규범을 파괴하고, 소수가 통치하는 귀족정을 구축하게 된다. 이러한 악순환 속에서는 자유가 민주주의를 지속적으로 파괴하게 된다. 요컨대 자유주의는 포퓰리즘의 구원자가 아니라 원인 제공자인 셈이다.

도널드 트럼피 미국 전 대통령은 극우적 포퓰리즘으로 당선된 바 있다. 그림=픽사베이

만약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희망은 무엇일까? 조사이어 오버는 대담하게도 이 물음에 답하려고 한다. 이 책의 부제이기도 한 ‘민주주의는 어떻게 자유주의 없이도 다양성을 지키며 번영하는가’라는 질문은 이를 직접적으로 반영한다. “자유주의적 비판자들은 민주정이 자유주의와 결합되기 전의 민주정은 지독한 반자유주의적 포퓰리즘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해왔다. 나는 민주정의 실현에 꼭 필요한 조건들이 내재적으로 자유주의적인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반자유주의적인 것도 아님을 보일 것이다.”

그는 자신이 제시하는 원초적 민주정이 ‘죽음의 소용들이에 빠진 자유주의적 민주정’의 구원자가 될 수 있다고 과감하게 주장한다. 그는 원초적 민주정이 정치적 자유·정치적 평등·시민적 존엄이라는 3가지 조건을 유지할 수 있으며, 그 핵심적 기제는 시민교육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논거 중 많은 부분은 고대 그리스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바로잡는 데서 출발한다. 

그의 결론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그가 현대 포퓰리즘에 대한 대안으로 제안하고 있는 고대 아테네에 대한 많은 새로운 관점의 접근은, 민주주의를 고민하고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 번쯤 읽어 볼 만한 풍족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관후 
건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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