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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77] 독방의 성자, 탈식민주의 사상가 압둘라 외잘란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77] 독방의 성자, 탈식민주의 사상가 압둘라 외잘란
  • 박홍규
  • 승인 2024.03.25 08: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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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압둘라 외잘란 1
탈식민주의 사상가 압둘라 외잘란

20여년 갇힌 외딴섬의 독방에서 흘러나오는 쿠르드인 사상가 압둘라 외잘란(Abdullah Öcalan)의 외침은 언제나 나에게 감동을 주지만, 온갖 외국 사상이 유행처럼 소개되는 한국에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어쩌다 뉴스에서 미국식 관점과 영어식 발음으로 ‘테러리스트 오칼란’으로 소개될 뿐인 그는 1999년부터 1천명 이상의 무장 군인들의 감시를 받으며 터키의 임랄리 섬에 홀로 수감된 지난 20여년 동안 식민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독특한 사상을 발전시킨 최고의 탈식민주의 사상가다.

그 오랜 세월, 도서관은커녕 참고서 한권 없이 어떻게 그리도 치열한 사고와 저술이 가능했는지 불가사의할 뿐이다. 그가 주장하는 민주연합주의에서 필수적인 개념들인 아나키즘, 페미니즘, 생태학, 직접민주주의 등을 20여년간 혼자서 생각하고 여러 권의 책으로 썼다니 정말 놀랍다.

내가 쿠르드에 대해 알게 된 것은 30년 전에 본 <욜>을 통해서였다. 쿠르드인 감독 이을마즈 귀네이가 군사독재하의 감옥에서 비밀리에 만든 영화인 <욜>은 1982년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군사정권의 수입 금지로 1989년에야 개봉됐다.

가출옥을 한 5명의 죄수 중 한 사람인 쿠르드인이 잠시 찾은 아름다운 추억의 고향 마을은 터키군 탄압으로 비참하기 짝이 없다. 함께 말을 타고 달리던 형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살해되어 그 주검이 바깥에 버려져 썩어가는데 그 주검을 보고 반응한다는 이유로 잡혀가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지금도 뇌리에 선연하다. 그 뒤 쿠르드족을 만나려고 몇차례 찾은 터키는 <욜>에서 보던 가해자였다.

질곡과 통한의 역사, 나라 없는 떠돌이 쿠르드족

터키 동남부와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이 접경을 이루는 약 30만㎢의 산악지대인 쿠르디스탄에 주로 거주하는 쿠르드족의 인구는 약 4300만명으로 국가를 갖지 못한 민족 중에서는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고 중동에서도 아랍인, 터키인, 페르시아인 다음으로 많다. 주로 목축을 하는 유목민으로 대부분 이슬람교 수니파에 속하고, 언어는 인도유럽어족 이란어계인 쿠르드어를 사용한다.

쿠르디스탄은 중세부터 근대까지 오스만 제국에 속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의 패전 후 영국과 프랑스가 멋대로 그은 국경선으로 분리되어 인구의 45%는 터키, 24%는 이란, 18%는 이라크, 6%는 시리아에 거주하고 있다. 쿠르드족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분리 독립을 요구했지만, 터키와 이라크, 이란, 시리아 4개국 모두 그 독립에 반대하고 도리어 더욱 철저히 탄압해왔다.

출생 연도가 불명하지만 2차대전 이후 1946년 또는 1947년에 터키 동부 시골에서 태어난 외잘란은 고향의 초등학교와 앙카라의 실업계 고등학교를 마친 뒤 여러 정치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쿠르드인의 권리에 관심을 가졌다. 이어 이스탄불대학에서 법학, 앙카라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면서 정치활동에 참가했다.

1972년에 쿠르드 정치인인 마히르 차얀(Mahir Çayan)의 살해에 반대하다가 처음으로 체포되었고, 좌파 잡지를 배포한 혐의로 기소되어 7개월 동안 수감되었다. 그후 여러 정치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쿠르디스탄이 식민지이며 혁명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외잘란은 1978년 쿠르드노동자당(PKK)을 창당하여 마르크스 -레닌주의, 쿠르드족의 역사와 국토를 비롯한 사상교육에 주력했다. 그는 무이념을 비난하고 이데올로기를 종교와 동일시할 정도로 중시하여 이념을 무시하면 짐승처럼 변한다고 주장했다. 1979년 시리아로 도망친 뒤 그는 시리아 정부의 지원으로 쿠르드족 게릴라들이 정치 및 군사 훈련을 받아야 하는 레바논에 PKK를 위한 두 개의 훈련 캠프를 설립했다.

외잘란은 1984년 독립 쿠르드족 국가를 세우기 위해 터키 정부에 대항하는 무력 캠페인을 시작했다. 그는 PKK의 쿠르드 해방 운동과 이라크에서 사담 후세인에 맞서 활동하는 운동을 통합하려고 시도했다. 쿠르드민주당(KDP)과 PKK 사이의 협상을 통해 후자가 이라크 쿠르드족 에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했다. 그는 또한 다마스쿠스의 KDP 지도자와 만나 묵은 문제들을 해결했으나 터키의 압력으로 인해 협력은 여전히 ​​소극적이었다. 

쿠르드족의 권리를 보장하라, 식민의 사슬을 걷어내자

그는 1988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터키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쿠르드족의 권리문제에 대해 확고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목표라고 언급했으며, 터키에 연방을 수립하기 위한 교섭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립과 분리주의의 차이를 강조하면서 서로 다른 민족이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면 같은 국가 내에서 독립하여 살 수 있다는 입장에서 분쟁에 대한 평화로운 해결책을 달성하려는 그의 의지는 그 뒤에도 반복되었다. 1993년에는 터키 대통령의 요청에 의해 협상에 임하고 이후 일방적 휴전을 선언했으나, 터키 대통령의 사망 후 터키 측의 협상 거부로 휴전은 중단되었다. 

이후 터키 정부가 시리아의 PKK 지원을 공개적으로 위협하자 시리아 정부는 외잘란에게 시리아에서 떠나라고 요구했다. 외잘란은 1998년 10월 시리아를 떠나 4개월 동안 쿠르드-터키 분쟁의 해결을 옹호하는 러시아와 그리스 및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를 여행했다.

11월 그는 쿠르드족 마을에 대한 터키의 공격 중단, 난민들의 귀환 허용, 쿠르드족에 대한 터키 내에서의 자치권 부여, 쿠르드족에 동등한 민주적 권리 보장, 터키인과 터키 정부가 지원하는 마을 경비대 시스템의 종료, 쿠르드족 언어와 문화가 공식적으로 인정 등의 7개 항목의 평화 계획을 자세히 설명했다.

1999년 1월에는 당의 해방 투쟁 초점이 게릴라전에서 대화와 협상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그 해 2월 그는 케냐 나이로비에서 미 중앙정보국(CIA)의 원조를 받은 터키 국가정보국(MIT)에 의해 납치돼 터키로 압송되었다. 그의 체포 이후 유럽에서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민족 지도자 외잘란, 마하트마(사인sayin)의 경지에 오르다

체포 이후 외잘란은 PKK 공격 중단을 촉구하고 터키 국경 내부의 쿠르드족 분쟁에 대한 평화적 해결책을 옹호했다. 적절한 변호도 없이 재판을 받은 외잘란은 최후 진술에서 다시 평화를 찾는 노력을 하겠다고 했으나 반역죄와 분리주의 혐의로 1999년 6월 사형을 선고 받았다. 같은 날 국제앰네스티 (AI)는 재심을 요구했고 휴먼라이츠워치(HRW)는 피고인이 데려온 증인이 재판에서 심리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했다. 1999년 10월, 전 유럽 PKK 대변인 알리 사판(Ali Sapan)을 비롯한 8명의 PKK 무장세력이 외잘란의 요청에 따라 터키에서 자수했다.

그러나 몇 주 후 이스탄불에서 항복한 다른 그룹과 함께 8명은 투옥되었고 터키 정부는 평화 계획을 기각했다. 외잘란은 PKK와 터키 보안군이 저지른 전쟁 범죄를 조사하기 위해 ‘진실과 정의위원회’를 설립하라고 촉구했다.

1999년 터키 의회는 외잘란의 형량을 20년 징역형으로 감형하고 PKK 무장세력이 제한된 사면으로 항복하도록 허용하는 소위 ‘회개’ 법안을 논의했지만 극우파의 저항으로 인해 통과되지 않았다. 유럽연합(EU) 가입의 조건으로 터키가 사형을 폐지하면서 형량은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 2000년 1월 터키 정부는 유럽인권법원 (ECHR)이 판결을 검토할 때까지 사형 선고를 연기한다고 선언했다. 2002년 8월 터키에 사형이 폐지되자 그해 10월 보안 법원은 그의 형을 종신형으로 감형했다. 

외잘란은 2004년 6월 스트라스부르의 ECHR에 항소했고 2005년 ECHR은 터키가 외잘란의 체포에 대한 항소를 거부하고 공정한 재판 없이 그에게 사형을 선고함으로써 유럽 인권협약 제3조, 제5조, 제6조를 위반했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외잘란의 재심 요청은 터키 법원에서 거부되었다. 2008년 외잘란을 ‘사인’(Sayın)이라고 부른 혐의로 949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고 7,000명 이상이 기소되었다. ‘사인’이란 ‘존경하는 인물’이라는 뜻으로 간디를 마하트마라고 부른 것과 같았다. 

체포된 후 외잘란은 마르마라 해의 임랄리섬의 유일한 죄수로 독방에 갇혔고 그를 감시하기 위해 1,000명 이상의 터키 군인이 섬에 주둔했다. 2009년 11월, 몇 명의 다른 수감자가 그곳에 압송되고 일주일에 10시간 동안 외잘란이 그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유럽평의회 고문방지위원회가 섬을 방문하여 그의 수감 환경에 반대한 후 새로운 감옥이 건설되었다. 그러나 2011년부터 2019년까지 그의 변호사는 외잘란을 면회할 수 없었고 700건 이상의 면회 항의는 모두 거부되었다. 다른 사람들의 면회도 거부되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했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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