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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 보고 만질 수 있는 구체적인 물질의 산물
듣고 보고 만질 수 있는 구체적인 물질의 산물
  • 배윤호 / 중앙대·연극영화학부
  • 승인 2007.07.15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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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_ 도시연구 현황과 쟁점] ⑤ ‘문화’로 본 도시

나는 공간연출자이자 프로덕션디자이너로  여러 다양한 매체 공간을 다루다 보면  매체(연극 ,영화 ,미디어) 마다 공간의 특이성이 있다 이러한 공간의 특이성을 설명하고 체험시키기 위해   학생들에게 첫 학기 첫 수업에서 그들이 다루어야할 공간을 포괄적인 의미에서 어디서부터 다루어야 하고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함축하여 세 가지 질문을 한다.
1. 도시에서 제일 먼저 일어나는 자를 인터뷰하고
2. 도시의 끝에 가서 경계를 그려오고
3. 도시에서 제일 사랑하는 자를 만나고 오는 것. 이 세 가지 질문에 답을 하는 학생들과 토론 하다보면 자신이 살고 있는 이곳은 다양한 경계와 구성방식 을 포함하고 있으며  도시라는 것이 장소에 개인적인 심리층이 다원적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이든다. 이런 3가지 질문에서 ‘문화적 관점에서 도시는 무엇인가’를 세 가지 키워드로 살펴본다.

이야기 공간 속의 도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 속에  구체적 장소와 함께 추상적인 공간들이 공존한다. 단순한 행정적 주소지, 번호가 아니라 당시의 심리적 상태, 경제적 컨디션, 욕망하는 방향 등으로 이야기공간속 의 도시는 정형화 성격 보다는 비선형적이고 비물질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자신의 어린 시절 동네를 떠올려보거나 부모님이 살던 집만을 생각해 보아도 유사체험을 생각할 수 있다. 이처럼 이야기속의 공간은 방향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말하는 것에 따라 보이는 것에 따라 변화하며 움직이는 안개덩어리, 해무(海霧) 같기도 하다. 어쩌면 꿈과 유사한 모양이라 하겠다.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Le Citta’ Invisibili, 1972)에서 쿠빌라이 칸에게 마르코 폴로가 설명하는 도시들은 이런 환상, 꿈, 욕망의 도시를 나열한다. 깔비노가 보여주는 숨겨진 도시, 지속하는 도시, 도시의 사자, 기호 등 매우 다양하면서도 시작과 끝을 잡을 수 없는 그런 도시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깔비노의 우화적 도시는 안데르센이 역마차를 타고 다니며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여행하며 만나고 배운 도시의 이야기를 우화로 만들었던 전통에서 카프카의 성이나 단편에서 보여주던 우화적 도시와 일맥 통하는 것이 있다. 문학 작품에서 도시를 다루고 보여주는 것은 도시의 문제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도시의 문제를 해결하고 해결점을 찾는 시도에서 또 다른 도시를 제시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점에서 유토피아냐, 디스토피아냐라는  주제가 다시 거론되지만 결국 살아가는 장소로써 도시는 이렇게 이야기속에서 다루어짐으로써 이야기의 흐름 속에 물리적 장소가 녹아서 비물질화하여 사람들의 입속에서 자라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이곳저곳으로 이동하여 마치 씨앗이 바람에 날려 다른 장소, 다른 땅에서 다시 자라 성장 하는 것과 같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처럼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하며 온몸으로 체험하여 기록한 여행기의 도시 모습은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깔비노가 서술한 도시만큼 낯설고 기괴하다. 이들은 한 걸음 한 걸음 이동하며 구체적 공간 체험이 내적인 성찰과 함께 이루어지다 보니 구체적 체험이 형상화 되면서 도시모습을 붙잡으려했다. 이런 움직이는 이야기의 선(흐름)은 긴 호흡의 선(운동선)이라 볼 수 있다면 머나먼 여행이 아니라 단순한 동내 산책에서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철학가의 산책의 선이나 작은 카페의 이야기속에서도 도시는 생겨나고 없어지기를 반복한다. 작은 선으로서 이야기 도시를 그려보건, 큰 선으로서 이야기 도시를 그려보건 자신이 겪는 공간을 체험화하는 과정을 내면화하여 자신의 환경을 붙잡아 보려는 행위라 볼 수 있다. 도시를 걸어 다니거나 조금이라도 자세히 관찰해보면 수많은 기념비와 장소의 의미를 부여하는 점들이 눈에 밟힌다. 조악한 형상이나 우아한 모습, 거대한 위협적 모양이든 상관없이 저마다 특수한 시간대 기억과 체험의 결과물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부여 방식은  어디까지나 땅을 바탕으로 한다. 그래서 물질적이고 계량적이며 한시적이다. 그러나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과 기록을 흐르는 물이나 바람, 하늘같이 흐름과 순환적 상태로 생각해보면  물질보다는 비물질적이고 계량적이라기보다는 우연과 즉흥적이며 한시적이라기보다는 지속적 순환구조와 유사하다. 이러한 비유는 도시와 문화의 관계와 유사할 것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많은 문화 생산물은 그 태어난 장소의 도시만을 담는 것이 아니라 구전과 기록을 통해 이 도시 저 도시로 흘러들어가 추종자, 숭배자, 반대자를 만들며 이야기속의 도시는 끊임없이 성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르코 폴로의 황금도시는 꿈의 도시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욕망의 도시로 성장하였고 새로운 신천지로 형상화하였다가 식민지의 고통의 도시로, 피로물들인 학살의 도시로 변모하였다. 이런 모습을 생각해보면 이야기의 도시는 나 자신의 도시이고 개인적인 도시이자 추상적인 도시이면서도 꿈의 도시이다. 또한  미완성의 도시 씨앗이며 우리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자라고 있는 진행형도시인 것이다.
저마다 수많은 도시가 있다.  그 중 이야기를 많이 가지는 도시야 말로 끊임없이 새로워지려는 생명력을 가지는 도시이다.

눈에 담는 도시
한 도시에 처음 도착한 이방인이나 관광객은 도시를 자신의 카메라에 담으려고 노력한다. 아마 도시문화의 전체 모습을 붙잡는 또 하나의 방법은 눈에 담는 도시이다. 영화의 탄생이 도시와 함께 이루어진 것과 영화의 카메라가 눈의 확장이라는 이론도 나름 대로 설득력 이 있다. 영화라는 카메라·영사기의 빛을 다루는 동력학적 방식(카메라)과 광화학적 방식(필름)의 이중적 결합방식의 산물은 보이는 도시의 모습을 기계에 담아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동시에 꿈과 욕망에 의지하던 이야기속의 도시공간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 이는 영화사의 시작을 알리는 영화 <뤼미에르 공장의 퇴근>(1895)과 동시에 멜리에스의 〈달세계 여행>(Le Voyage dans la lune, 1902)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단순한 다큐적 관찰과 마술적 꿈의 재현이라는 이분법보다는 도시라는 모습 자체가 이중적이라는 것, 도시의 모습이 달빛과 태양의 자연광이 아니라 전기 빛이라는 새로운 빛의 도시가 만들어지면서 빛으로 만든 도시를 눈에 담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초기 무성영화에서 감독들은 이러한 빛의 도시모습을 어떻게 카메라 눈에 담을 것인가의 고민들이 영화사의 시작과 함께 시작한다. 이러한 고민들은 무르나우(Friedrich Wilhelm Murnau)의 <일출>(1927)이나 프릿츠 랑(Fritz Lang)의 <M 1931>, <메트로폴리스>( Metropolis, 1926)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일출>은 무르나우가 농촌과 도시의 극단적 생활방식의 대비를 파우스트의 낭만주의적 기법에 의지하며 구체적 이야기구조와 공간의 상호관계성을 바탕으로 선·악, 도시와 농촌의 대비, 그에 따른 빛의 대비를 보여주었다. <메트로폴리스>는 지하계급과 지상계급 간의 갈등을 주된 구조로 하여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대립, 인간과 기계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며 기계 인간과 사랑, 종교적 광기, 집단 폭동 등 1920년대 당시 베를린의 시대 상황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대립 구조가 보여주는 집단적 갈등은 인간 내부의 문제에도 투영된다.
이처럼 눈에 담은 도시 공간은 하나의 대화적 관계로 설정할 수 있으며 그 대화의 공간에서 서로 상호 보완하고 있다. 빈 화면을 바라본다는 것과 빛으로 도시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의 관계는 그 대화의 주체는 보는 자, 나 자신이며 보는 자는 이해하는 자로서 자기 삶의 공간의 확장으로 그 사이를 건너다닌다. 이러한 이해 지평의 확장이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고 다양성을 한층 두텁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를 좀 더 깊이 있게 다가가며 다양하게 생각해보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우리가 영화를 보는 것은 이렇듯 자신의 경험 밖 세계를 확장하여 이해해 보려는 시도일 것이다. 우리는 눈에 도시를 담듯이 서로 같이 살아가는 다른 곳의 사람들의 모습까지 담는 것이다. 그것이 외면적이든 내면적이든 관계없이.

손 안에 도시
결국 문화적 관점에서 도시는 도시를 이야기하고 듣고 바라보며 느끼고 구체적으로 손으로 만 질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도시는 결국 구체적이고 물질적이다.
우리가 도시의 비물질적인 면을 이야기 하면서도 결국 물리적 환경으로 회귀된다. 이는 그릇과 내용물의 차이라 비유할 수 있고 내용을 충실하게 다루어도 결국 손 안에 만져지는 구체적 산물이 있어야 한다. 문화도시라는 이름으로 많은 계획들도 결국 구조물을 짓거나 구체적 사물들을 만드는 것으로 귀결 될 때가 많다. 아니면 새로운 청사진도 결국 구조체이다. 개념적 단어도 새로운 운동도 물질로 규정되는 현실에 과연 깔비노가 <보이지 않은 도시>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도시는 무엇이었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초기 무성영화에서부터 시작한 눈에 담은 도시는 이제 UCC를 통해 전 지구적인 곳을 눈에 담는다.
자신을 둘러싼 이 도시도 이 손으로 바꿀 수도, 새로 만들 수도 있는 것처럼 손 안에 도시는 자율적 의지에 따라 형성되어 지는 것이다.
요즘은 더욱 강력한 도구 스마트 핸드폰이 이 손에 들려 지워져있다. 이는 손안에 있는 도시이다. 석기-노동기구-필기도구-컴퓨터 자판에 이르는 순서적 변화보다 융합적이며 도시환경과 상호 반응하는 도구로 진화할 것이고 문화의 흐름도 이 손안의 도구를 인터페이스화하여 물질과 비물질이 교류하는 장소가 되고 있다. 이 지점이 바로 손 안에 도시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자유의지라는 것이 있어 이 도구를 통해 역사를 이어가고 새로운 변화를 만들며 도시구성원의 이야기가 넘쳐나는 것을 지향하는 도구가 될지 우리의 손을 묶고  우리의 자유의지를 억압하는 도구가 될지는 바로 우리 손에 달려있다.

#깔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1972) 중
쿠빌라이 : “아마도 이러한 우리의 대화는 쿠빌라이 칸과 마르코 폴로라고 별명이 붙여진 두 부랑자가 나누는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소. 이들은 쓰레기 더미를 정신없이 뒤지고 있고, 너덜너덜한 폐품들과 누더기 천 조각들, 휴지들을 쌓아올리고 있으며, 질 나쁜 포도주 몇 모금에 취해 그들 주위에 동방의 온갖 보물이 번쩍이는 것을 보고 있소.”
폴로 : “아마도 이러한 세상에는 쓰레기장으로 덮힌 황량한 땅과 그란 칸의 왕궁 옥상 정원이 남아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들을 구분하는 것은 우리의 눈까풀이지만 어떤 것이 안이고 어떤 것이 밖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에우사피아보다 더 인생을 즐기고 고통에서 도망치려는 경향을 가진 도시는 없습니다. 삶으로부터 죽음으로의 도약에 민감해지지 않으려고 주민들은 그들의 지하 도시와 동일한 복사품을 건설했습니다.
베르사베아(Bersabea)에는 다음과 같은 믿음이 얽혀 있습니다. 또 다른 베르사베아가 하늘에 매달려 존재하고, 그곳에는 도시의 가장 고상한 감정과 덕이 서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 지상의 베르사 베아는 천상의 베르사베아를 모델로 삼을 것이고 그에 따라 천국을 가진 유일한 도시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레오니아(Leonia) 도시는 매일 스스로를 재생시킵니다. 아침이면 전주민은 깨끗한 시트 위에서 잠을 깨고 방금 포장지를 벗긴 향수 비누로 몸을 씻고 새로 염색한 옷을 걸치고 최신의 냉장고에서 아직 뚜껑도 열지 않은 우유 단지를 꺼냅니다. 내내 최신 모델의 기계에서 최근의 만담을 들으면서 말입니다.

배윤호 / 중앙대·연극영화학부


 

필자는 HFF 포츠담 바벨스베르크영화학교 프로덕션디자인전공 디플롬을 받았다. 영화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 미술감독을 지냈다. 저서로 <베를린, 도시의 기억 : 영화 속의 도시 이미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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