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實利보다는 義理가 살아 숨쉬는 대학사회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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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수신문
  • 승인 2007.07.21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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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Ⅰ_지자요수 인자요산]知者樂水 仁者樂山에 담긴 뜻

이제 장마철을 보내고 나면 여름 휴가를 보낼만한 여행지도 이곳 저곳 떠올리게 됩니다. 여름철이면 설레는 즐거운 고민속에 하나의 생각거리도 보탰습니다. 흔히 회자되는 말로 ‘지자요수 인자요산’이라는 글귀가 있습니다. 잠시 그 의미를 되뇌이며 각 지역의 ‘토박이’ 교수들이 추천하는 여행지의 유래와 역사를 엿보는 재미도 곁들였습니다.

목형, 몸보다 마음이 더 덥고, 매사 짜증나는 장마철입니다.
함량 미달의 대선 주자들이 토해내는 수많은 미사여구와 분수 밖의 행동과 탐욕이 세상을 화덕 속같이 달구고 있습니다. 이번에 형이 보내주신 형의 땀과 세월이 흠씬 배어있는 “知者樂水 仁者樂山”이라는 글씨 한 점은 저에게 온 밤을 하얗게 밝히면서까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교수는 지자이어야 하는가 인자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그러한 구분 자체가 무의미한 것인가 등등의 본질적인 물음 때문에 말입니다.
목형, <논어, 옹야편>에 나오는 이 말은 달리 설명을 붙일 필요가 없을 만큼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알려진 만큼 이 말의 참뜻을 알고 또 그것을 올바르게 실천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知者와 仁者라는 개념에 대한 이해의 부족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은 아닐는지요. 易學的 관점에서 보면 仁과 知는 인간 본래성의 본질적 구조이며, 인의예지 四德이 현실적으로 구현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디딤돌과 같은 덕목입니다. 그래서 <주역, 계사상전> 5장에서는 天道를 계승하여 善性으로 규정된 인간의 본래성이 仁과 知로 요약된다고 하면서 “天道를 계승하는 것이 善이고, 天道를 완성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다. 仁者는 天道를 보고 어질다고 하고 知者는 그것을 보고 지혜롭다고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목형, 이처럼 仁과 知는 인간 본래성의 본질구조를 표현하고 있는 개념입니다.
따라서 유가의 인간관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자나 인자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갖기 매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주지하다시피 知者樂水 仁者樂山’에 대한 지금까지의 해설의 전범은 朱子였습니다.
주자에 의하면 지자는 事理에 통달하여 매사에 두루 통하고 막힘이 없는 사람이고, 인자는 義理에 편안하여 重厚하고 자신의 뜻을 쉽게 바꾸거나 옮기지 않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오늘날 중국의 철학계를 대표한다고 하는 리쩌허우(李澤厚) 역시 주자의 설을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그는 <논어금독>에서 지자와 인자를 가리켜 “인자는 믿을 만하고 안정적이고 공고하고 장구한 것이 산과 같은 사람이고, 지자는 영민하고 빠르고 유동적이고 변하는 것이 물과 같은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朱子를 멀리 벗어나 있는 학자가 있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우리나라 사람인 신영복 교수입니다. 그는 ‘나의 동양고전 독법’이라고 부제를 붙인 <강의>라는 책에서 지자와 인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신 교수에 의하면 지자는 서있거나 바쁘게 뛰어다니는 사람이고 인자는 한 곳에 앉아서 지긋이 눈감고 있는 사람입니다. 인자는 세상의 무궁한 관계망을 깨달은 사람이고, 지자는 개별적인 사물들 간의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목형, 여기서 저의 우둔한 생각의 일단을 덧붙여 볼까 합니다. 제 생각은 역학적 관점에서 지자와 인자를 이해해 보자는 것입니다. 仁은 봄이고 陽이고 정신이고 미래입니다. 반면에 知는 겨울이고 陰이고 물질이고 과거입니다. 仁은 양이므로 발산을 특징으로 하고 있고, 知는 음이므로 수렴을 그 특징으로 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지자는 실리에 밝고 시류에 잘 영합하는 사람이라고 일단 정의해 볼 수가 있고, 인자는 실리보다는 의리를 먼저 생각하고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자가 물질적 삶을 더 중시한다면 인자는 정신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지자가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고 과거 지향적이라면, 인자는 미래에 대한 통찰력과 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목형, 오늘날 우리나라의 대학 현실은 어떻습니까. 인자가 되기를 포기하고 지자로서의 학자의 삶을 추구하는 교수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들은 발등의 불밖에 보지 못하고 미래에 대한 확신이나 자기 인식에 대한 각성이 없습니다. 인자로서의 학자는 시류에 아부하지 않고 자기의 소신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고, 민중과 고통을 나눠가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미래지향적 사고를 가지고 살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소신을 지킬 줄 알고, 자기 분수를 지켜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치세가 아니라 난세입니다. 난세에 필요한 인물은 지자가 아니라 인자입니다. 학계의 진정한 주인은 지자로서의 교수가 아니라 인자로서의 학자이어야 한다고 또 감히 주장하면서 이 글을 마칠까 합니다.
목형, 또 구업을 많이 지은 것 같습니다. 문득 <논어, 태백편>의 한 대목 선비는 仁으로써 자신의 책임을 삼으니 어찌 막중하지 않으며 죽은 다음에야 끝이 나니 어찌 멀지 않겠는가”라는 증자의 말이 가슴을 치고 지나갑니다.

송인창 / 대전대·철학과


 

필자는 충남대에서 ‘선진유학에 있어서의 천명(天命)사상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동춘당 송준길>이 있으며 현재 한국동양철학회장을 맡고 있다. 충청지역 유학 연구와 주역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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