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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성 출신 등소평, ‘금의환향’ 않고 고향 앞에 멈춘 까닭
사천성 출신 등소평, ‘금의환향’ 않고 고향 앞에 멈춘 까닭
  • 교수신문
  • 승인 2007.09.16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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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의 中國 散策 ]中지도자들의 고향 사천·호남성

초기에 중국 공산혁명에 참가했던 지도급 인사들의 면모를 보면 이상하게도 호남성, 사천성 출신이 많이 눈에 띈다. 쉽게 이름을 댈 수 있는 사람으로 모택동, 주은래, 주덕, 유소기, 임필시, 팽덕회, 임표, 하룡, 유백승, 진의, 등소평, 담진림, 도주, 나서경, 엽검영과 곽말약 등을 들 수 있겠다. 그중 모택동, 유소기, 임필시, 팽덕회, 하룡, 담진림, 도주는 호남성 출신이고, 사천성 출신으론 주덕, 유백승, 진의, 나서경, 곽말약과 등소평 등이 있다. 중국 10대 元帥만 해도 10명 중 6명이 두 지역 출신이다. 주덕, 유백승, 진의, 섭영진이 사천성, 팽덕회와 하룡이 호남성이다.

그런데 유소기와 팽덕회, 하룡 등 호남성 출신들이 문화대혁명 때 가장 심하게 고초를 당했고, 억울하게 죽었다. 사천성 출신인 등소평은 끝내 살아남아서 모택동 시대를 마감하고 새 시대를 여는 역할까지 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호남성과 사천성 출신 지도자가 1949년 이래 중공 정권을 도맡아 왔다고 얘기할 수도 있겠다. 호남성과 사천성은 매운 음식으로 유명한 고장이다. 모택동은 호남성 사람들이 매운 것을 좋아하는 것과 혁명을 결부시켜 매운 걸 잘 먹어야 혁명도 잘 하는 것이라고 곧잘 호언했다.   

등소평은 사천성 출신들과는 끈끈한 인연을 맺고 있었다. ‘人脈’이란 말이 이 경우 어폐가 있을지 모르지만, 등소평이 일생동안 신뢰와 우정을 나누었던 혁명 동지 중에는 사천성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일생을 형제처럼 지낸 사람으로 주덕, 유백승, 진의, 섭영진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등소평의 장점이자 진가는, 지역을 넘어서서 당대의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과 폭넓은 교유와 인간적인 신뢰를 쌓아 왔다는 사실이다. 10대 원수 중 임표를 제외하고는 모두 가깝게 지냈고,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을 통해 이런 저런 인연으로 깊은 관계를 맺었다.

등용은 『나의 아버지 등소평』에서 “이상한 일이기는 하지만 10대 원수 가운데 아버지는 아홉 사람과는 사이가 좋았으나 유독 임표와는 왕래가 없었다. 이는 주로 임표의 성격이 괴팍해 종래 누구와도 왕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전하면서, 등소평과 아홉 장군들과의 인연을 거론하고 있다. 그중 하룡에 대한 부분만을 옮겨본다.

“하룡은 털보라고 했는데, 성격이 남달리 호탕했다. 서남에서 우리 두 집은 아래 위층에서 살았고 아이들의 나이도 엇비슷해 늘 함께 놀고 싸웠다. 해방 후에 아버지는 늘 우리를 데리고 하 아저씨 집으로 놀러 다녔는데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웃음꽃을 피우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장난치며 노는 것이 남이 보면 한집 식구나 다름없었다”

등소평은 고향 선배인 주덕을 아주 존경했다. 진의와는 친형제 이상으로 가깝게 지냈다. 유백승과는 사령관과 정치위원으로 오랜 기간 生死苦樂을 같이 했다. 사천성 출신인 유백승과 등소평이 고향인 서남지역으로 진격해 들어갈 때, 모택동은 갑자기 하룡 부대를 그 지역으로 이동시켜 두 부대가 사천성을 함께 점령하도록 했다. 등소평의 ‘蜀王’을 경계하기 위한 모택동 특유의 포석이었다는 해석이 유력했다. 그러나 등소평은 한 치의 내색도 없이 걸출한 장군이었던 하룡과도 한집안 식구로 지내는 친화력과 인간적인 매력을 발휘했다.                 

나는 아직 張家界란 명승지를 가보지 못했다. 중국 여행 중 명승지라곤 태산, 아미산, 계림을 빼고는 특별히 기억에 남는 데가 없다. 西安만 해도 공산혁명과 관련이 있어서 두 번이나 다녀왔을 뿐이다. 요즘 한국의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장가계 홍보물을 보다가 ‘賀龍’이란 이름을 발견하고, 하룡 장군이 바로 이곳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앞에서 인용한 호탕한 성격의 털보 장군인 그 하룡이다. 하룡은 南宋의 충신 ‘岳飛장군’이란 별명을 갖고 있다. 그는 모택동이 농민의 무장봉기를 시도하기 10년 전에 이미 고향에서 농민폭동을 주동했던 전력을 갖고 있다. 주은래, 주덕 등과 남창기의를 주도하면서 공산당원이 되었다.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하룡도 홍위병들의 ‘투쟁’의 대상이 되었다. 홍위병들은 1967년 정월, 이틀에 걸쳐서 하룡의 집을 뒤지고 1천매나 되는 기밀문서들을 압수해 갔다. 잠시 중남해 안 주은래의 거처인 西花廳으로 피신했었지만 역시 안전지대는 아니었다. 간신히 서부지역에 은신처를 마련했으나 그곳은 임표와 비밀경찰 두목 康生이 지배하는 구역이었다. 강생은, ‘투쟁’만 일삼기에는 너무 벅찬 존재였던지 ‘의학적 수단’을 써서 하룡의 죽음을 재촉하기로 했다. 오랫동안 당뇨를 앓고 있어서 인슐린 치료를 받아야 하는 하룡에게 인슐린이 아닌 포도당 주사가 놓아졌다. 1969년 6월, 하룡은 그렇게 죽어갔다.

장가계엘 가면 빼어난 자연 경관뿐 아니라 그 지역의 역사 이야기도 알고 오는 것이 좋겠다. 일찍이 漢 고조 劉邦의 개국공신인 張良은 ‘토사구팽(兎死狗烹)’을 미리 피해서 경관이 수려한, 이곳 靑巖山 골짜기로 깊숙이 숨어들었다. 원래 이 지역엔 張 씨 성을 가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하는데, 장량이 있고부터 ‘張家界’가 되었다. 하룡은 1896년, 이러한 특이한 유래를 가진 장가계의 상식현에서 태어나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현재 그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고, 생가 앞의 풍우교도 현재 하룡교로 불리고 있다. 장가계 여행에서 ‘하룡’이라는 이름 하나를 통해 우리는 문화대혁명 등 격동의 중국 현대사에 접근할 수가 있다. 

등소평은 고향인 사천성을 사랑하고 그리워했다. 그래서 말년의 그는 짬을 내어 峨眉山과 樂山 등 명산과 명소를 찾기도 하고 장강 유람에 나서기도 했다. 사천성 아미산은 3099미터 높이로 새벽 해맞이가 유명하다. 1989년 겨울에 내가 찾았던 아미산 정상은 짙은 안개 속에 묻혀 있어서 아쉽게도 해맞이를 못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러나 등소평은 그의 생가가 있는 광안은 일생토록 찾지 않았다. 이유는 고향 사람들을 번거롭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자식들에게도 될수록 고향 광안을 찾지 말라고 일렀다. 1980년대에 들어 중국의 실질적 국가 지도자는 당연히 등소평이었다. 그 ‘영광’의 자리에서도 그는 ‘금의환향’을 스스로 마다했다. 고향이 바로 코앞인 성도까지가 스스로 정한, 귀향 코스의 마지막 지점이었다.

□ 중국의 명승지로 알려진 장가계. 주은래, 주덕 등과 남창기의를 주도하면서 공산당원으로 활동한 하룡 장군의 출신지이자, 한 고조 유방의 개국공신 장량이 유년시절을 보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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