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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問 말고 어디에 일생을 불태울 수 있을까
學問 말고 어디에 일생을 불태울 수 있을까
  • 교수신문
  • 승인 2008.04.14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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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가 말하는 학자의 길

사람들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앞에서 당황해 한다. 비슷한 방식으로 30년 넘게 학자로 살아 온 한 은퇴 교수도 ‘학자의 길이 무엇인가’라는 물음 앞에선 옷깃을 여미게 된다. 인간이상론, 학자이상론의 물음은 새로운 꿈을 필요로 하고, 나름대로의 반성을 요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일상과 분리된 형이상학적 의무의 공간, 상아탑에 거주하면서 시대변화를 꿈꿀 때  그 꿈이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야 하는 가는 지속적인 성찰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19세기를  “세계를 기술하는 참 체계는 유일하다”라는 의미에서 절대주의 시대라 한다면, 그 이전의 동서양의 세기들 또한 모두 절대주의시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20세기는 세계를 기술하는 참 체계들의 복수성을 인정해 절대주의 또는 모더니즘을 해체하는 다원주의 시대가 됐다. 다원주의 시대의 학문이 절대주의 시대의 학문과 달라야 한다면 어떻게 다를 것인가. 21세기를 살고 있는 학자는 학문의 이념, 이를 향한 태도, 그 보람이 무엇일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그림을 그릴 만하다.


전통적으로 학자는 ‘영원한 지식의 탐구자’로 이해돼 왔다. 이 경우의 ‘영원한 지식’은 절대주의적 관점 이외의 다른 것을 지칭하지 않는다. 朱子는 正學만을 학문의 과제로 삼고 이외의 논설을 이단으로 배척했으며,  A.헉슬리는 인생의 목적을 유일한 진리, 형이상학적 궁극자로 이뤄지는 통합적 지식의 발견이라 주장했다. “태양도 하나, 달도 하나, 그러니 영원한 지식도 하나”라는 믿음에 기초했으리라.

이러한 학문론 위에 입각해 있을 때 전통적 학자의 길은  아주 분명하다. 학자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 正論(locus classicus)을 먼저 배우고 알리는 것이었다. 서양의 중세 학자는 그 귀감이 됐고, 르네상스 시기의 학자는 교회전통중심에서 벗어나 희랍고전 중심으로 학문을 새롭게 했다. 동아시아의 선비는 溫故知新 속에 도덕과 예술(詩書畵) 그리고 풍류를 통해  통합적 인간상에 도달하고자 하면서도 그 일차적 소임은 정론을 계승·전수하는 것으로 보았다.

절대주의 학문론을 해체한 것은 언어론이다. “참은 특정 체계의 문장의 성질(참 말이니?)” 이라는 언어론이다. 이것이 다원주의의 문법이다. 다원주의를 체계간 非通約性이 유지되는 이론적 다원주의와 체계간 소통이 이뤄지는 담론적 다원주의로 나누어 본다면, 이론은 학자 개인의 구성적 언어지만 담론은 공동체를 전제하는 언어이다. 사실 개인의 이론도 학자 공동체의 평가에 열려있다는 의미에서 공동체 포섭적이다. 다원주의 학문은 관련된 전문가 공동체에 따라 평가, 유지, 발전된다. ‘진리’는 더 이상 학문이나 지식을 규정하는 가치기준이 아니다.


2천년 동안 학문을 지배해 왔던 진리의 자리에 전문가 공동체가 들어 왔다. 21세기의 학자들은 과거와는 다른 학문의 지형도를 그려야 하는 것이다. 계승-전승해야 하는 영원한 지식은 없고 정보는 누구에게나 접근 가능한 것이 됐다. 학자는 소속된 공동체에 창조적 기여 가능성으로만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창조성은 고전이해, 현실파악, 새로운 시각, 공동체 담론의 문법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다. 

만일 학자가 소속된 전문가 공동체에 창조적 기여로써만 그 존재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학자의 삶은 치열하지 않을 수 없다. 퇴근, 주말, 휴가를 독립적으로 즐길 수 있는 비전문직 종사자와는 달리 전문직 종사자는 일과 여가를 분리할 수 없다. 의사, 변호사 같은 전문직은 최신 정보와 기술을 습득해 개인적 삶을 보호하고 개선하는 것을 일차적 목표로 한다면, 학자 전문직은 전문가 공동체의 구조 안에서 지식 확장을 과제로 삼는다.

교수는 모두 학자이다. 인문 사회 자연 과학 뿐 아니라 응용과학, 예체능분야의 모든 교수들이 그러하다. 학문의 다원주의적 공동체적 이해에 의하면 더욱 그러하다. 두 영역의 분리주의는 모더니즘적 학문론의 결과이다. 그리고 연구와 교수의 기능 이분법도 근거가 없다고 믿는다. 학기 중의 강의 품을 팔아 방학의 연구 자유 시간을 산다고 가정해 보면, 학기 중의 강의는 분야 전문성을 확보하는 계기이고 방학의 연구 때는 창조적 해석 관점을 세우는 때이다.

학자와 다른 공동체의 관계는 무엇일까. 지난 50년 동안 인문학과 자연과학은 새로운 학과 학문이 거의 없지만 사회과학과 응용과학, 예체능분야의 경우에서는 새로운 학문분야가 급속도로 확장되고 있다. 인간역사의 발전이 그러한 전문가 공동체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문과 사회의 관계가 보다 긴밀해진 것이다. 또한 다원주의적 공동체 학문론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학자는 대학보직이나 사회진출에 열려 있을 수 있다. 학자적 사고는 개념 공간의 토론과 비판에 익숙하다는 점에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자의 일차적 소속은 언제나 전문가 공동체이다. 때문에 이러한 열림은 대학사회의 공동체적 지침을 따라야 한다. 

학자의 삶은 어떻게 인정돼야 하는가. 한국 대학 강사의 처우는 개선돼야 한다. 굳이 자동차 회사 노동자나 버스 기사의 예를 들어 비교할 필요는 없으리라.  처우는 경제적 생산성뿐 아니라 인력의 대체 가능성이 고려돼야 하기 때문이다. 학자의 보상은 사회적 명예, 금전적 인정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 인간 자유의 확장에 기여하고 있는 데 대한 보람이다. 노동자나 기사는 이러한 종류의 보람의 기회로부터 다분히 박탈돼 있을 것이다.  

학자는 왜 학문을 삶의 방식으로 선택한 것일까. 여러 선배 학자들이 “공부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라고 말한다. 이 겸손한 대답 속에 삶의 구조가 보인다. 개념 공간에선 토론과 비판에 열려 생산적이어야 하므로 정직하고 겸손하게 된다. 언제나 배우고 있으니 매일이 새롭다. 그리고 “배우고 또한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이 문장의 질서는 학문 말고 어떤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실현 될 수 있을 것인가. 학문 말고 어디에서 일생의 삶을 이렇게 치열하게 살면서 동시에 즐길 수 있을 것인가.

필자는 고려대에서 ‘지식개념의 일상언어적 분석’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분석철학 전공자이면서 인문학 전반과 한국적 철학 관련 논문을 꾸준히 발표해 왔다. 『맞음의 철학』, 『필연성의 문맥적 이해』, 『지식이란 무엇인가』, 『한국어와 철학적 분석』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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