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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계획서에 너무 욕심부렸더니…
강의계획서에 너무 욕심부렸더니…
  • 교수신문
  • 승인 2008.04.14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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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차 신임교수의 강의체험기

작년 새 학기 시작을 몇 주 앞두고 가르칠 과목을 배정받았을 때는 참 당황스러웠다. 개학까지 불과 몇 주 밖에 남지 않았는데 어떤 책을 교재로 선정하고 어떤 식으로 한 학기 강의를 계획해야 하는지 아무런 정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과, 다른 대학의 여러 선배 교수님들께 문의를 하고 다른 여러 강좌의 강의계획서를 기초로 해 간신히 강의를 시작할 수 있었지만 3월 내내 강의준비로 일과를 보내는, 하루 벌어서 하루를 사는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런데 4월 들어 한숨을 돌리게 됐을 때, 아뿔싸 깨달은 것은 내가 하고 있는 강의 방식이 학생들과 소통하는 데 그리 효율적이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수학교육과 학생들에게 가르치던 미분적분학은 학생들 수준에 비해 내용이 너무 쉬웠고, 컴퓨터교육과 학생들에게 가르치던 이산수학은 익숙하지 않은 책과 익숙하지 않은 파워 포인트 자료를 학생들에게 설명하는 것이 수월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만들어진 데는 사실 몇 가지 특별한 이유가 있다. 우선 내가 부임한 학과가 작년에 처음으로 신입생을 받은 신설학과였기 때문에 학생들 수준에 대한 파악도 전혀 돼 있지 않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선배교수도 전무했다. 또 전공과목도 전혀 개설할 수 없었기에 타과 강의를 맡아야 하는 등의 어려움이 있었다. 그리고 그 학기가 내가 한국에서 한국어로 강의를 시작한 첫 학기라는 사실도 어려움을 겪은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작년 4월 이후 1학기가 끝날 때까지 그래도 주어진 틀 안에서 최선을 다하려 노력을 했지만, 그래도 그 틀의 한계를 극복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서 2학기에 미분적분학2, 그리고 확률과 통계를 가르치게 됐을 때에는 내 나름의 강의계획을 철저히 세워 보리라고 생각했다. 우선 미분적분학2는 가르치는 내용을 조금 더 심화시키는 것으로 충분해 그리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확률과 통계 과목은 1학기에 가르친 이산수학만큼 낯선 과목이었기 때문에 교재 선정부터 쉽지 않았다. 교재의 수는 왜 그리 많은지, 그리고 통계와 관련된 컴퓨터 소프트웨어는 왜 그리 다양한지. 다행히도 여러 출판사에서 도움을 줘서 여러 책을 검토할 수 있었고, 그래서 어렵사리 교재를 선정하고 또 한 학기 강의계획서를 무사히 작성할 수 있었다. 100퍼센트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만족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작년 2학기 강의는 1학기에 비해서 무척 수월했고 그러면서도 재미있었다. 물론 강의평가도 많이 향상됐다. 사실 내가 있던 미국의 대학들에서는 미분적분학, 선형대수 등 기초과정 모두 강의계획이 너무도 잘 잡혀 있어서 교재는 무엇을 사용하는지, 언제 무슨 강의를 하고 몇 월 며칠에 무슨 시험을 보는지 모두 결정돼 있었다. 나는 그냥 그 계획에 맞춰 강의를 하면 됐다. 또한 교재 외의 여러 자료도 무척 풍부해 강의준비를 하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았는데 한국에서 강의를 하면서 많은 공부를 한 셈이다.

그래도 미국에서 강의를 하는 것보다는 사실 한국에서 강의를 하는 것이 더 재미있다. 내 영어실력이 모자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나와 상이한 교육적 배경(educational background)을 가진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그리 편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강의에 대한 지원이 아직 미국에 비해 부족하기는 해도 내가 지금 몸담고 있는 학교에서는 강의법과 관련한 워크숍을 개최하는 등 강의 지원이 점차 나아지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강의실 내 멀티미디어 관련 기기는 사실 미국보다 훨씬 좋다.

이번 학기에는 드디어 전공과목인 해석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지금 막 한 달이 지난 시점에서 강의계획서보다 벌써 1~2주 정도 진도가 늦어지고 있다. 아무래도 강의계획서를 작성할 때 너무 욕심을 부렸던 것 같다. 이런 시행착오를 앞으로 몇 번을 더 겪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서 열정 못지않게 경험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 같다. 이번에도 하나 더 배웠으니 아마도 내년에는 더 나은 강의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이렇게 매년 배우기만 할지도 모를 노릇이다.

오병근/ 한양대·수학교육과

필자는 지난해 상반기 한양대 수학교육과 조교수로 임용됐다. 미 퍼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워싱턴대 Acting Assistant Professor, 한국고등과학원 연구원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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