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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빛은 길을 안고 삶을 품었다. 서로를 보듬는 불빛을 보라!
새벽빛은 길을 안고 삶을 품었다. 서로를 보듬는 불빛을 보라!
  • 박태일 시인/ 경남대·국문학
  • 승인 2008.12.31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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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단상] 시인이 노래하는 새 날

희부옇게 흩뿌려 둔 아이들 가루 장난감 같다. 어떤 자리는 은빛 줄을 지었다. 다른 도시로 나가는 빠른 길이다.
어둠이 잔뜩 내려앉은 산등성이와 거리거리 환한  주거지, 그리고 너머 더 어두운 바다 쪽이 서로 뚜렷하게 나뉜다. 낮은 골짜기를 중심으로 몰려 핀 불빛들은 무엇에 골몰하는지 반짝반짝 흔들린다. 할 말 많은 듯 입술을 들썩인다. 해발 422미터, 황령산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새벽 부산은 크작은 불빛의 모둠 모둠살이다. 멀리서 찻소리 웅웅 올라온다. 일어나지 않은 사람의 잠이 곳곳에서 얽히겠다. 잠결에 칭얼대는 아이를 위해 젊은 어머니는 분유통을 더듬거리리라. 어느 등성인지 고함소리가 가까워졌다 멀어진다. 새벽 장을 보거나 먼 데 일터를 지닌 사람이라면 벌써 집을 나서야 할 5시가 넘은 때. 모든 첫 버스들이 종점을 떠났을 시각이다. 새벽 걸음에 나서는 사람 가운데는 해를 넘기지도 않고 취업 재수를 위해 서울-부산철길에 몸을 실을 아파트 아랫집 아들도 있다. 위아래 살며 초등학교 적부터 자라는 모습을 지켜 본 아이다. 어머니 말로는 가을에 한 차례 면접을 보고 온 뒤 방안에서 나올 생각도 않고 풀죽어 있다 했다. 지난 해와는 견줄 수 없이 악화된 취업 환경에 크게 낙담한 게다.
대학 졸업 학기를 미루면서까지 준비했음에도 번번한 기회가 없다 얻게 된 한 번의 면접. 그 아들에게 새 양복에 새 구두를 신겨 보냈던 어머니를 나는 안다.

糖을 녹이는 해묵은 병치레로 여윈 자기 몸보다 아들을 걱정하는 아버지를 더 잘 안다. 1층 문턱을 집으로 삼고 도둑고양이가 한 마리 아파트에 머물게 된 일도 여러 달 지났다. 사람들은 그러려니 여긴다.
아이들이 건넨 먹이가 만든 버릇이다. 저녁 밥때면 어김없이 모습을 드러낸다. 지난 밤은 어느 쪽 어둠을 밟고 다녔을까. 더 추워지면 그 놈은 아파트 안에서 살 궁리를 할 것이다. 지금은 버릇대로 아파트 들머리, 담장집 담장 바깥 무화과나무 가지에 올라앉았으리라. 새벽 예불을 나선 아주머니, 입마개며 장갑을 챙기고 일찍 학교 운동장으로 나선 이들을 파란 눈으로 훔쳐보겠다. 

어둠 속에 떠 있는 불빛 한길에는 7층 큰 병원도 있다. 앓는 이를 실어 온 비상차와 함께 따라온 가족, 간호사의 부산한 옷바람이 느껴지는 복도, 그리고 갖가지 무거운 약 냄새. 위쪽 요양병동에는 침묵을 붕대인 양 감고 누운 이들이 산다.
그들 속에는 당신의 병 수발을 맡았던 이모를 오히려 먼저 여윈, 늙은 이모부도 계신다. 병원 앞길을 환경미화원이 바쁜 비질로 지나간다. 흩어진 종이 쓰레기와 비닐꽃, 남은 자신의 삶까지 비질하듯 익은 몸놀림이다. 그 뒤로 차는 달려오고 달려간다. 

그리고 뒷골목에는 진짜국밥집이 있다. 새벽부터 문을 열고 아침 손을 받는 여주인. 무럭무럭 김이 끓는 큰 가마솥 두 개가 창으로 비치는 식당이다. 손자가 방학 숙제로 썼던 가훈, ‘넓게 알고 깊게 생각하며 바르게 행동하라’는 붓글씨가 거울 위에서 낡아가고 있는 곳. 국밥을 먹으러 갈 때마다
낯설게 보이던 그 글발이 그녀 가족이나 드나든 손들에게는 어떤 격려가 되었을까.
그렇게 새벽빛은 길을 안고 삶을 품었다.

곁을 떠나려는 불빛을 끌어당기며 흔들리는 불빛. 멀찍이 떨어진 불빛으로 넘어지는 불빛, 제 목을 감싸 안는 불빛, 주저앉았다 힘겹게 일어서는 불빛도 있다. 산꼭대기에서 멀리 내려다보는 앞바다는 어둡다. 불빛 줄지어 환한 부두에서는 아침 뱃길을 준비하는 엔진이 막 발톱 다 자란 살쾡이처럼 개릉거리겠다. 파도 갈기에 몸을 맡긴 배 고물 위로 갈매기 끼욱거리겠다. 그래도 바다. 바다는 깨지 않았다. 저 바닷가에는 한때 하루바삐 어른이 되고 싶었던 한 소년이 거닐었다. 어른이 되면 무엇이든 뜻한 바를 이룰 수 있으리라 믿었던 그때. 바닷가 포구가 배 끊긴 생선회 상가 단지로 뒤집혀 가는 세월을 마냥 따라왔다.

이제 바닷물에 적셔 볼 추억조차 아슴한 자리. 옆구리 깊은 데서부터 까닭없이 솟곤하는 슬픔은 목숨 가진 사람의 한결같은 버릇이라며 건성으로 넘기자. 목젖을 뒤집는 노여움에도, 그것을 눌러 삼키는 쓰라림에도 익숙해진 나날 아닌가.
새벽은 왔다. 그렇게 간다. 희붐한 여명이 도심에 깔리기 시작하면 새벽빛은 도시 이곳저곳에서 끊어졌다 이어졌다 높다가 낮다. 아침 노을도 동녘 하늘을 다 채울 듯 붉더니 금방 식었다. 구름이 두터웠던 까닭이다. 바람을 이고 진 곰솔 능선, 남으로 내려다보는 거리는 이제 어제와 다름없이 아침이다.

산으로 오르는 이가 더 잦다. 걷는 사람, 뛰는 사람. 혼자 또는 서넛 함께 어울린 이. 내외 함께 걷는 사람. 새벽마다 해를 바라 산으로 향하는 이들이다. 저들은 산 곳곳에서 화톳불같이 즐겁게 타오를 것이다. 간이 체육시설 곁에서 한 중늙은이가 허리굴렁쇠를 돌린다. 운동기구를 당기고 있는 이도 여럿이다. 낯빛이 좋다.
자신의 기억만큼이나 숱한 곡절을 건너왔을 사람들. 배우지 못해 소리 칠 수 없었고, 지닌 게 적어 뜻을 꺾을 수밖에 없었을 나날. 그럼에도 어떤 보람이, 희망이 지켜주고 보듬어준 삶이다. 개를 데리고 오르던 젊은 여자가 잠시 서서 돌아본다.

가까운 곳에서 늦깬 왕벚나무 한 가지가 부러지는 소리였을까. 추운 바람 속에서 가지마다 새 움을 쥐고 길가에 촘촘히 섰다. 사람 발에 밟힌 가랑잎과 온전한 가랑잎이 뒤섞여 구른다.
휑하니 하늘을 긋고 산비둘기가 날아간다. 까치가 차례로 깍깍거린다. 쪽쪽쪽 바람을 쫀다. 촉새를 닮으려나 보다. 이 가지 저 가지 옮겨 다니는지 소리가 높았다 잦아든다.

다시 멀다. 산 아래 쪽으로 날아갔다.아랫집 아들이 새벽 잰 걸음으로 탄 기차는 지금쯤 낙동강 줄기를 벗어나 밀양이나 청도로 들었을 것이다. 어느덧 모든 것이 서울 서울로만 더욱 열리게 된 세월 이다. 철길도 서울 길은 마냥 빨라졌다. 불빛 사라진 도시는 모습이 뚜렷하다. 양회로 쌓아 올린 커다란 시루탑 시룻집. 다딱다딱 부딪칠 듯 몸을 밀쳐내며 돋은 고층 아파트 잿빛 척추가 곳곳에 허옇다.
사람도 길도 깼다. 길바닥을 훑는 차들 불빛만 아직 새벽 기분을 낸다. 그래 그 많던 불빛이 모두 환멸일 리야 있는가, 모멸일 리야 있나. 젖은 휴지처럼 간수하기 난처한 허욕과 치정, 온데 엎지르는 정치처럼 흥건했던 지난 밤 어둠은 어디로 갔을까, 또 불빛은. 첫 새벽에 서서 내려다보는 새 아침은 맑다. 새벽빛 식은 거리는 밝다.

산을 내려가던 아주머니 둘이 멈추어 선다. 멀리 해를 향해 허리 깊은 합장을 세 번 올린다. 몸에 마음에 오래 익은 경건함이다.
다시 걷는다. 나도 산 아래 산마을로 길을 잡는다. 슬레이트 처마 낮은 집들이 층계를 이룬 응달 마을 물만골. 허물어진 벼랑 아래 푸른 망사를 두른 텃밭 마른 푸성귀 위로 들쥐가 긴다. 낡은 냉장고며 깨진 플라스틱 물통이 길섶에 널브러졌다.
장독대에 크작은 독을 옴기좀기 키운 마당집도 보인다. 장독 안의 장물은 오래 어둠까지 졸아들어 더 짜겠다. 여러 날 서 있었을 듯한 작은 화물차가 한 대, 연제이용원 표시등은 벌써부터 돈다. 춥다, 춥다.

마을 공부방이 있는 좁은 골목에서 방금 학생차림 한 소녀가 나온다. 마을버스가 올라온다. 탄 자리보다 빈 자리가 늘 많은 버스다. 삼십 분 머문 뒤 다시 내려갈 것이다. 얇은 지붕을 누르고 있는 돌멩이들이 가난 마냥 무겁다. 세상이 절망을 가르치더라도 절망에 질 수야 없다.
시대가 비굴을 버릇 삼더라도 비굴에 엎어질 수야 없다. 눈앞의 영욕이야 비탈을 구르는 가랑잎. 철모르고 오그려 핀 개나리가 꽃잎을 들썩인다.
겨울까지 서서 마른 국화꽃이 노랗다. 아, 아직도 입술 꼭꼭 깨물며 살아야 할 날이 남은 까닭이다.

박태일 시인/ 경남대·국문학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詩作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운 주막』, 『겨울 악견산』 등의 시집이 있으며, 『한국 근대시의 공간과 장소』 등의 저서를 상재했다. 절제된 시어, 사물을 깊게 응시하는 빛나는 시선으로 한국시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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