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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르의 ‘이론적 실천’에 대한 역사유물론자의 직격탄
알튀세르의 ‘이론적 실천’에 대한 역사유물론자의 직격탄
  • 변상출 대구대 기초교육원 초빙교수·독문학
  • 승인 2013.10.07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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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 _ 『이론의 빈곤』 에드워드 파머 톰슨 지음 | 변상출 옮김 | 책세상 | 456쪽 | 23,000원

 

 

지금으로부터 아득히 먼 1978년에 출간된 에드워드 파머 톰슨의 『이론의 빈곤』이 ‘신자유주의’의 ‘시장 구조’에 꽁꽁 묶여 있는 듯한 오늘 우리에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선 이 물음의 답은 ‘역사’의 해석을 “위험의 순간에 번쩍이며 솟아오르는 기억의 손잡이를 붙잡는 것”이라고 했던 발터 벤야민의 ‘역사테제’에서 얼핏 구할 수 있을 법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론의 빈곤』이 까마득히 잊힌 마르크스주의 역사유물론자 톰슨과 흐릿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를 다시 만나게 하는 ‘기억의 손잡이’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톰슨(1924~1993)과 프랑스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1918~1990)는 외관상 서로 닮았으면서도 그 내용에서는 서로 완연히 다르다. 서로 닮은 모습은 우선 정치적 이념의 색채가 같은 점에서 두드러진다. 그들은 세계관적으로 ‘공히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해 있으면서, 정치적 ‘실천’의 행보로써 양쪽 모두 공산당에 입당해 왕성하게 활동했다. 그리고 인식론적 관점에서도 이들 모두는 하나같이 유물론을 표방한다. 물론 이때 갈라지는 인식론상의 미세한 분깃점도 있다. 그것은 곧 ‘우발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이다.


그런데 이들의 유물론 앞에 붙는 ‘우발적’과 ‘역사적’이라는 수식어는 이들 전체 이론과 실천의 지평을 가르는 핵으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예사롭지 않다. 왜냐하면 그 분깃점이 미세하지만 본질적이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역사성을 강조할 경우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만든다’는 인간 주체성이 부각되는 반면에 우발성에 방점이 갈 경우 자칫 역사는 ‘주체 없는 과정’이자 ‘편의(d´eviation)’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무기력한 존재로 전락시키는 ‘사물화’ 비판
톰슨의 『이론의 빈곤』 전체를 관통하는 비판의 핵은 인간 ‘주체’에 대한 부정과 인간을 무기력한 존재로 전락시키는 ‘사물화’이다. 톰슨은 알튀세르를 염두에 두고 『이론의 빈곤』 앞머리에서 “아무튼 우리 모두는 공히 마르크스주의자들이다”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지만 말미에 이르면 “우리가 더 이상 공통의 전통이라는 통념에 어떤 이론적 의미도 끌어다 붙일 수 없다”라고 단호히 선을 긋는다. 그 선이 너무 굵어 “좌파에겐 적이 없다”는 연대운동의 기본 공식마저도 지워버릴 정도다.


여기서 알튀세르(주의)를 향해 날리는 톰슨의 비판은 ‘직격탄’이다. 말하자면 알튀세르는 국제공산당의 ‘동지’는커녕 ‘(우리에게) 아주 오래된 적이자 스탈린주의 권력의 근거’이고, 알튀세르주의는 ‘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의 치안활동’, ‘이론의 패러다임으로 환원된 스탈린주의’, ‘스탈린주의의 결과이자 그것의 지속’ 등으로 통한다.


무엇이 그를 ‘공히 마르크스주의자’인 알튀세르에 대해 이토록 분개하게 만들었는가? 반핵평화운동을 비롯해 사회주의 활동가로서 사회 민주화운동을 평생 업으로 삼았던 그가 왜 자타가 공인하는 마르크스주의자 알튀세르를 그렇게 몰아세웠을까? 그 실재가 도대체 뭘까? 그 답은 두 사람이 살아온 ‘경험’의 차이 그 자체에서보다 알튀세르 이론에 면면히 작동하는 ‘주체 부재’의 논리와 ‘이론적 폐쇄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역사학자이자 사회 운동가인 톰슨에게 핵심 키워드로 작동하는 아이콘은 역사(주의)·경험(주의)·도덕(주의)·인간(주의)이다. 이 아이콘들을 관류하는 양극은 “역사는 규칙동사일 수 없다”는 역사유물론과 “남성들과 여성들이 투쟁의 실제 경험으로부터 만드는 자기 규정적인 구성형태”에서 인간을 구조의 ‘매개자(vector)’가 아니라 구조의 ‘제작자(maker)’로 간주하는 주체성의 관점이다.

‘과정의 논리학’ 통해 ‘인간의 능동성’ 강조
역사유물론의 용광로를 가동시키는 톰슨의 원리는 ‘과정의 논리학’이다. 물론 이 ‘과정의 논리학’을 통해 톰슨이 은연중에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능동성’이다. 곧 그것은 ‘구조의 폐쇄성’이 아니라 ‘주체의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의 과정이란 압력을 결정하는 주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톰슨이 『이론의 빈곤』 전체에서 ‘불관용의’ 냉혹한 입장을 보이는 대상은 ‘과정의 논리’를 배제하는 ‘자기 폐쇄적이고 자체 반복적인’ 장치들이다. 여기에는 알튀세르의 ‘이론적 실천’으로 대변되는 ‘이론적 제국주의’, ‘경험 감각들의 길목’을 차단하고 ‘도덕적·미학적 기관들’을 억압하는 ‘생산양식’이라는 이름의 ‘지배적인 구조’, 역사의 과정을 ‘사물화’해 역사에서 인간을 축출하는 구조주의적 해석 등이 포함된다.


대개 우리에게 알려진 알튀세르(주의)는 이 같은 ‘폐쇄성’ 내지는 ‘환원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주지하다시피 알튀세르는 1990년대 초 동구 현실사회주의의 붕괴에 따른 ‘마르크스주의 위기’의 시대에 빠른 속도로 한국에 널리 알려지게 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였다. 당시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로부터 ‘마르크스주의의 전화’ 가능성의 중심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요컨대 그의 핵심 개념들, 이를테면 상대적 자율성·중층결정·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이데올로기적 호명·이론적 실천 등의 개념들은 전통 마르크스주의의 스펙트럼을 확장시켜주는 아이콘들로 이해됐던 것이다.


그러나 정녕 이 같은 개념들에 대한 톰슨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했다. 싸늘하다 못해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그 연유는 알튀세르의 대표적 아이콘인 ‘이론적 실천’에는 인간 ‘작인’으로서의 경험적 ‘주체’ 개념이 배제돼 있기 때문이다. 물론 톰슨에게 알튀세르의 결정적인 문제는 ‘주체’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톰슨이 문제로 삼는 것은 모든 것을 ‘이론적 실천’으로 돌려놓는 알튀세르의 이론적 ‘환원주의’이다.
이런 환원주의에서 톰슨은 ‘이론의 패러다임으로 환원된 스탈린주의’를 읽어냈던 것이다. 이 같은 환원주의를 톰슨은 ‘정태적 구조주의’라고 못 박았다. 이 구조주의에서 부정되는 것은 톰슨이 부단히 구제하려고 하는 개념들, 즉 역사(주의)·경험(주의)·인간(주의)·도덕(주의)다. 톰슨의 다음과 같은 반문은 이론적 환원주의를 넘어 어떤 연대 운동에서든 꼭 고려해야할 핵이 무엇인지 반성하게 만든다. “이론이 반도덕주의와 반인간주의, 그리고 이성의 경험적 조리개 일체의 폐쇄를 가르친다면 이론은 ‘좌파’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인간포부의 푸른 이파리’향한 지적 모험
1997년 이후 해일처럼 밀어닥친 ‘신자유주의’의 거센 물결이 쉴 새 없는 ‘경쟁’의 파상 공격을 통해 사람들의 혼을 쏙 빼놓은 실정이다. 대서사의 주체는 소멸된 듯하고, 왜소해진 주체들이 무한경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목전의 이익’을 붙잡기에도 급급해 보인다. ‘인간 포부의 푸른 이파리 하나’ 찾기도 너무 가파른 현실이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지금이야말로 이 ‘인간 포부의 푸른 이파리 하나’라도 찾으려면 그 가능으로써 톰슨이 『이론의 빈곤』에서 말하는 ‘대화’가 절실히 필요한 것이 아닐까! 물론 이 ‘대화’가 ‘우리끼리의 옛 이야기’가 되지 않으려면 ‘대화’는 문 안팎에서 이뤄져야 할 것이다. 숨 꼴깍 넘어 가게 만드는 신자유주의의 경쟁의 험악한 물결 못지않게 ‘인간 포부의 푸른 이파리’라는 따뜻한 인간주의적 담론도 이웃의 담장을 넘고 넘어 ‘인간해방’에 목말라 하는 현실의 남자들과 여자들을 만나야한다. 이 ‘대화’에 그나마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희망에서 『이론의 빈곤』의 때늦은 현재성을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변상출 대구대 기초교육원 초빙교수·독문학
필자는 서강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예술과 실천』, 『포스트 문화논리를 넘어』가 있고, 번역서로 『이성의 파괴』(전2권)와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흐름』(전3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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