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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때 활동했던 권필의 문집 … 출중한 詩才 불우한 삶
광해군 때 활동했던 권필의 문집 … 출중한 詩才 불우한 삶
  • 이상하 한국고전번역원 교수·한국경학
  • 승인 2013.10.21 16: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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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번역원 - 교수신문 공동기획 ‘고전의 숲’ 10. 『국역 석주집』

 

▲ 『국역 석주집』권필 지음 ㅡ이상하 옮김 2책 민족문화추진회, 2006~2007
石洲 權韠(1569~1612)은 조선 500년을 통틀어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출중한 시인이다. 그는 뛰어난 문인들이 대거 쏟아져 나와 穆陵盛際로 일컬어지는 宣祖 시대에서도 시로는 단연 당대의 으뜸이라는 평판을 받았다. 석주도 본래 입신양명의 뜻을 품고 과거 공부를 해 覆試에 장원했으나 답안에 한 글자를 잘못 쓴 것이 뒤늦게 발견돼 합격이 취소되고 말았다. 그리고 몇 해 뒤에 이른바 辛卯黨事가 일어나 그의 스승 鄭澈이 江界로 귀양가자 정치현실에 염증을 느껴 벼슬을 아주 단념하고 詩酒로 소일한다.


그렇지만 그는 뛰어난 詩才를 인정받아 布衣의 선비로서 두 차례나 명나라 사신을 접반하는 使行에 들었다. 33세 때에는 명나라 사신 顧天埈과 崔廷健를 영접할 때 製述官으로 뽑혀 遠接使 李廷龜를 수행했다. 이정귀가 詩名이 높은 고천준을 상대하기 위해 특별히 추천한 것이었다. 38세 때에도 원접사 柳根의 추천을 받아 제술관에 임명돼 접빈에 참여했다. 포의로 이러한 영예를 누린 것은 실로 전무후무하다. 그의 詩才가 얼마나 뛰어났던가를 알 수 있는 단적인 사례다.

그의 명성이 세상에 크게 알려져 두 차례 童蒙敎官에 제수됐으나 나아가지 않고 야인으로 일생을 마쳤다. 강개한 성품에 저항정신이 강했던 석주는 광해군의 처남인 권신 柳希奮을 풍자하는 이른바‘宮柳詩’를 지었다가 곤장을 맞고 귀양길에 올랐다. 동대문 밖에 이르렀을 때 친구들이 차려준 술자리에서 통음하고 杖毒이 덧나서 이튿날 세상을 떠났으니, 시인의 마지막 또한 그의 삶만큼이나 극적인 것이었다.

권력에 저항한 자유분방한 정신
『석주집』에는 시 836수, 문 25편이 실려 있다. 거의 대부분이 시이므로 시집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석주는 다양한 詩體를 두루 잘 구사했고 그의 시세계도 다양하지만, 오늘날 독자들이 읽기에는 현실을 풍자, 비판한 작품들이 특히 재미있을 것이다. 그 중에 두 수를 소개한다.


“궁궐 버들 푸르고 꽃은 어지러이 나는데(宮柳靑靑花亂飛)/성 안 가득 벼슬아치들 봄볕에 아양 떠는구나(滿城冠蓋媚春暉)/조정에서는 다 같이 태평시대 축하하거늘(朝家共賀昇平樂)/그 누구 위태한 말을 포의에게 나오게 했나(誰遣危言出布衣)” ‘宮柳詩’로 불리는 문제의 작품으로 원제목은 「任茂叔이 削科됐다는 말을 듣고」이다. 이 시의 내용은 광해군 妃 柳氏의 아우 유희분을 비롯한 외척의 방종을 비난한 것이라 한다. 광해군 3년(1611)에 진사 任叔英이 별시문과의 殿試에서 답지에서 외척의 교만 방자한 작태를 비판했는데, 광해군이 답지를 보고 크게 노하여 과거의 榜에서 임숙영의 이름을 빼라고 명했다. 석주가 뒤늦게 그 소식을 듣고 이 시를 지었다 한다. 茂叔은 임숙영의 자이다. 이 시에서 宮柳, 즉 궁궐의 버들이 柳氏를 비유한 것임을 말할 나위 없다. 광해군이 이 시를 보고 대노해 그 출처를 찾다가 金直哉의 誣獄에 연루된 趙守倫의 집을 수색하다가 이 시의 원고가 발각돼 광해군의 親鞫을 받았다.


다음은 역시 석주의 시 중에서 잘 알려진「忠州石」이다.
“충주의 좋은 돌은 유리와 같이 고운데(忠州美石如琉璃)/(중략)/가서 권세가의 신도비를 만들지요(去作勢家神道碑)/신도비에는 누가 글을 짓는고(神道之碑誰所銘)/(중략)/하늘이 돌을 낼 때 입 없는 게 다행이지(天生頑物幸無口)/돌에 입이 있다면 응당 할 말이 있으리라(使石有口應有辭)” 권문세가에서 없는 사실을 장황하게 날조해 비석을 세우는 세태를 신랄하게 풍자한 것이다. 오늘날 현실에 비춰 읽어도 느낌이 새롭다. 이 밖에도 「행로의 어려움[行路難]」, 「古長安行」 등도 혼란한 정국을 풍자한 시로 알려져 있다.


이 밖에는 석주가 30세 때 전라남도 장성군 오산(鰲山)의 黃溪에서 머물 때 趙緯韓, 纘韓 형제와 주고받으며 지은 聯句詩인 「土泉에서 同宿하며 읊은 聯句」, 「黃溪에서 동숙하며 읊은 聯句」, 「토천에서 재회했을 때 읊은 聯句」, 「述懷聯句」 등 장편들에서 그의 풍부한 文史와 번득이는 詩才를 감상할 수 있다.

성리학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사상적 보폭
석주의 산문 중에서는 「酒肆丈人傳」, 「郭索傳」이 잘 알려져 있다. 석주는 朴知誡에게 성리학을 배웠다고 하지만 그의 분방한 기질 탓인지 그 사상은 아무래도 성리학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끝으로 이러한 그의 사상을 잘 보여주는 짧은 산문 「雜述」을 소개한다.


孟春(음력 1월) 초하루에 두 사람이 나를 찾아왔는데 썰렁한 바람이 불어와 뜰을 배회했다. 한 사람이 말했다. “이상해라, 바람이여! 바람은 무슨 氣인가?” 내가 대답했다. “천지 사이에 가득 찬 것은 하나의 氣일 뿐인데 기는 모이고 흩어짐이 있고 오르내림이 있습니다. 대저 바람이란 기의 자취인데 무엇이 이것을 불게 하는가? 理가 스스로 그러한 것입니다.”하고, 이어 손을 들어서 그에게 보이며 말했다. “그대는 이 손을 아시오?” “손입니다.” “손이 손인 것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는 고요했고 지금은 움직이며 조금 전에는 굽혔고 지금은 폈으니,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氣입니다. 기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는 나의 소유가 아니라 하늘입니다. 하늘은 무엇인가? 기일 뿐이고 理일 뿐입니다. 하늘에 리와 기가 있어 만물이 생겨나니, 만물의 관점에서 자신을 보면 만물은 제각각 만물일 뿐이지만 하늘의 관점에서 만물을 보면 만물도 하늘입니다. 그러니 바람이 내가 아니며 내가 바람이 아니라고 어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두 사람이 서로 돌아보며 탄식했다.


“아침에 밖에서 오는데 길에 있는 자들이 모두 남 아님이 없었습니다. 이제 주인의 말씀을 듣고 보니 정신이 아득하여 다르게 느껴집니다. 나 자신을 찾아도 스스로 찾을 수 없거늘 누가 남이겠습니까.”
두 사람이 나간 뒤에 문을 닫고 이 말을 기록한다.
손의 움직임으로 바람의 원리를 설명한 것은 시인다운 즉흥적이고 직관적인 발상이다. 손을 굽혔다 펴는 것을 가지고 氣의 움직임을 설명한 것은 陰陽을 기의 屈伸으로 보는 『周易』의 사상과 같다.


이 글에서 작자는 理와 氣로 우주의 현상을 설명했지만 그 사상은 오히려 불교나 老莊에 가깝다. 여기서 리는 성리학에서 말하는 리의 主宰性을 잃고 기의 운동 원리로만 존재할 뿐이다. 성리학에서는 우주의 근원자를 理라고 한다. 리가 우주의 유일한 실존이고, 리가 기를 통해 자기의 실존을 나타내는 것이 우주의 삼라만상이다. 그런데 작자는 ‘하늘은 무엇인가? 기일 뿐이고 理일 뿐’이라 했으니 程伊川이 ‘하늘이 곧 리다[天卽理]’라고 한 명제와 어긋나고, 다시 ‘하늘에 리와 기가 있어 만물이 생겨난다’ 했으니 하늘이란 근원자가 리와 기를 가지고 있는 셈이 됐다. 하늘이 근원자가 되고 리와 기가 근원자의 손발이 된 듯한 느낌이다.


이러한 논리에서 만물은 모두 하늘에서 나온 것이니, 하늘의 관점에서 보면 만물 전체가 하나의 하늘일 뿐이다. 각양각색의 개체로 나뉘어 있는 현상 전체가 그대로 하늘인 것이다. 따라서 바람과 나도 하늘이 자신을 나타내어 보인 현상일 뿐이다. 논리가 다소 거칠고 비약적이다. 학자의 글이 아니라 분명 시인의 글이다. 『석주집』에 별집을 추가할 때 우암 송시열이 그 발문을 쓰면서 석주가 젊을 때 戱作한 시, 승려들과 酬唱한 시, 풍자가 심한 시 등을 제외하고 100수만 뽑았다고 한다. 지금 그 작품들이 남아 있지 않아 석주의 정신세계와 사상을 더 폭넓게 읽지 못하게 된 것이 몹시 아쉽다.



이상하 한국고전번역원 교수·한국경학
필자는 고려대에서 박사를 했다. 민족문화추진회 부설 국역연수원 연수부를 마쳤으며, 고전번역연구소 소장, 퇴계학연구원 책임연구원 등을 지냈다. 『아계유고』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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