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16:35 (금)
외진 수유리 그곳에 핀 꽃들 … 그대가 묻혀야 할 곳은 시대의 가슴이었네!
외진 수유리 그곳에 핀 꽃들 … 그대가 묻혀야 할 곳은 시대의 가슴이었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3.11.11 17: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원히 젊은 청년들의 집

2013년 11월 6일. 수능시험 하루 전 날 ‘국립 4·19민주묘지’에는 가을비가 성기게 내리고 있었다. 묘역을 감싼 삼각산 자락 위로 운무가 모였다 흩어지면서 붉은 단풍 절경을 드러냈다. 평일이었지만 묘역 곳곳에 한 무더기씩 여인들 무리가 ‘찬송가’나 ‘찬불가’를 부르면서 기념하고 있는 풍경이 이어졌다. 그 사이로 간단한 츄리닝 차림의 젊은 여성이 지나가는 모습도 눈에 들어 왔다. 시간은 오후 2시. 등산복 차림의 늙은 남자들도 여럿 보였다.


‘서울특별시 강북구 4·19로 8길17(구 수유4동 산 9-1번지)’. 국립4·19민주묘지가 위치한 곳이다. 4월이 오래 전에 지난 11월인데도 유족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것은 먼저 떠난 이들을 잊지 못해서다. 시위 중에 입은 부상으로 앓다 세상을 떠난 동생의 忌日이라 찾아온 한 유족 일행은 빗방울이 제법 굵어지는데도 아랑곳 않고 묘비 앞에 둘러앉아 낮은 목소리로 亡者의 넋을 위로하고 있었다. 묘비 옆에는 造花로 된 하얀 무궁화와 분홍 무궁화가 바람을 맞고 있었다.


묘비 앞이 아니라 소나무 앞에서 추모식을 하는 유족도 보였다. 기자는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묻지 않았다. 그 늙은 여인들은 여기가 맞다, 그렇게 말하면서 몇은 소나무 주변에 서고, 둘은 나무 근처로 바짝 올라서 낮은 목소리로 위로와 평안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짐작컨대, 그들은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못한, 그러나 4·19와 깊은 인연을 안고 살았던 어느 한 故人을 追念했던 것이리라. 죽어서라도 4·19의 젊은 청년들 곁에 가까이 묻히고 싶었던 그는 누구였을까. 그는 어떤 시간을 살다 생을 마감했을까.


언제인가 삼각산을 오르던 중 삼각산 자락이 품은 ‘국립 4·19민주묘지’를 내려다보다 기이하게 터를 잡고 있는 그 모습에 놀란 적이 있었다. 유영봉안소-묘지-기념탑과 분향소-참배대기광장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동선을 삼각산 자락은 고즈넉하게 품고 있었다. 그곳은 외부와 단절된 깊고 깊은 휴식처인 동시에 현대사의 외진, 변두리 공간으로 비쳐지기에 충분했다.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1학년 등 상고머리 푸르디푸른 청춘, 청년들이 쓰러져간 자리가 아닌, ‘수유리’ 그 너머에 이들의 안식처를 마련하겠다는 발상 자체에서 ‘주변화된 역사’를 읽을 수 있다고 하면 지나친 讀法일까.


그날 쓰러져갔던 청년들은 지금 기묘한 同居를 하고 있다. 하나는 1963년 묘역 조성 당시의 일그러진 시대풍경과의 동거다. 시인 이은상과 조각가 김경승의 글과 조각 작품이 묘역 전체 공원을 감싸고 있다. 어느 누구도 이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국립 4·19민주묘지’를 거닐 수 없다. 특히 김경승은 기념탑, 기념탑 하단 청동 인물상, 기념탑 좌우 부조, 기념탑 앞 좌우 수호자상, 중앙 잔디광장 좌우 통로에 도열해 있는 12개의 ‘수호예찬의 비’를 만들었다. 그를 두고 ‘친일예술가’라고 부르는 것을 떠나, 그가 4·19의 대척편에 섰던 ‘이승만’ 흉상을 제작한 인물이었다는 점을 본다면, 그는 이 묘역에 잠든 청년들의 넋과는 함께 설 수 없는 인물임에 틀림없다.


“이승만 박사의 망명 전 저택 이화장에 생전의 모습을 재현한 흉상이 건립, 설치된다. 이 흉상은 원로조각가 김경승씨가 제작한 것으로 이 박사의 111회 탄신일인 26일 하오 3시 이화장에 기증된다.”(<중앙일보>, 1986년 3월 25일자) 1993년 ‘친일미술인백서 발간 소위원회’에 참여했던 최석태에 의하면, 김경승이 이 흉상을 만든 것은 4·19가 있기 전인 1959년의 일이다. <중앙일보> 1985년 8월 5일자는 “오는 8월 15일 광복절에 하와이 호놀룰루의 한인교회에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동상이 세워진다”라고 보도했다. 물론 조각가는 김경승이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또 하나의 기묘한 同居는, 오늘 우리가 4·19를 호명하는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한 유족의 말이 가을비 속에서 여운을 남겼다. “그때 같이 시위대에 참가해서 우리 동생은 죽었지만, 같이 독재정권 물러나라고 외쳤던 이들 중 상당수는 거물 정치인이 되는 등 한국사회의 주역이 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청년 때의 때묻지 않은 순수한 열정은 사라지고, 자신들이 욕하고 물러나라 했던 그 사람의 모습을 닮아간 거 같아요. 처음에는 연락도 하고 찾아오기도 했지만 금방 소원해지고 말았죠.”

죽은 자들은 말없이 청춘의 청년, 理想으로 누워 있지만, 살아남은 자는 천천히 현실의 힘에 동화돼 가고 말았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교활하고 노회한 혓바닥이 돼 날름거렸다. 4·19는 젊은 청년의 순수한 열정, 민주주의를 향한 아름다운 헌신, 속화되거나 변질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갱신해나가는 하나의 ‘과정의 정신’이다. 그렇다면 ‘국립 4·19민주묘지’가 어떤 모습으로 기억돼야할지도 자명하지 않을까. 해마다 4월 진달래꽃 아래 발길 찾는 정치인들의 ‘화환’냄새가 아니라, 잠들었으되 죽지 않고 시퍼렇게 두 눈 뜨고 영원한 청년으로 남고자 하는 그 청년 정신을 호명하는 방식으로.

글·사진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