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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 윤찬영 전주대·사회복지학과
  • 승인 2014.01.02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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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릴레이 에세이

지난 2005년 3월부터 2010년 1월까지 약 5년 동안 나는 지역에서 라디오 생방송 시사프로를 매일 1시간씩 진행했다. 스튜디오에 ‘On Air’ 불이 들어오면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생방송 OOOOO 윤찬영입니다” 하면서 청취자들께 인사를 하고 오프닝 멘트를 했다. 이 말이 입에 붙게 돼 학회에서 사회를 볼 때에도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사회를 맡은 윤찬영입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이 때 방청석에서 약간의 웃음소리가 들리곤 했다. 학회 토론회를 하는데 느닷없이 방송토론과 같은 인사말이 튀어나왔기 때문이었으리라. 5년간 약 1천300회 가량 이 말을 서두에 뱉어냈던 것이다.


이제 와 돌이켜보건대, 나는 진정으로 청취자들이나 방청객들에게 그분들의 안녕을 물었던 것일까? 물론, 그랬던 날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대개는 의례적인 인사말이었다. 그래서 이제 와서 그 죗값을 받는 것일까. 지난 연말부터 우리 사회에는 “안녕들 하십니까?” 열풍이 불었다. 고려대 학생의 대자보에서 시작한 이 짤막한 인사 한마디가 시대적 공감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의례적으로 했던 인사말이 이렇게 진한 감동으로 다가오는 진풍경이 빚어진 것이다.


공자의 제자인 子貢은 공부를 뛰어나게 잘 하지는 않았지만 끊임없이 질문하는 제자였다고 한다. 겸손한 자세로 윗사람에게 묻는 자세를 갖췄던 것이다. 진정으로 공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의 의견을 구하는 자세, 이것을 乞言이라고 한다. 안녕하냐는 인사말도 그냥 의례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공손하게 상대방의 안녕을 묻는 것이 걸언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만나 인사할 때, 그냥 “안녕”, “반갑다” 정도의 인사가 바쁜 현대사회에 어울릴 수도 있지만 인사의 진정성을 인정하기엔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 진정으로 안녕한지, 밥은 제대로 먹고 있는지, 따뜻하게 지내고 있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 하는 일은 잘 돼 가고 있는지를 여쭙다보면 인사를 하는 데에도 시간이 적잖이 걸릴 것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은 현대사회를 기본적으로 위험사회로 규정한다. 이는 현대사회의 과학기술 발전과 물질적 풍요가 가져다 준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이다. 위험한 사회에서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우선적으로 물어야 하는 것은 안녕한지 여부다. 그래서 진정으로 “안녕하십니까?” 해야 한다.

인간의 욕구(needs)와 관련해 가장 많이 인용되는 매슬로우(A. Maslow)는 인간의 욕구를 단계적으로 파악한다. 가장 1차적 욕구로서 생리적 욕구를 규정하고 2차적 욕구로서 안전의 욕구를 든다. 생리적인 욕구와 안전의 욕구가 충족돼야 애정의 욕구, 존경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와 같이 고차원의 욕구 충족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안녕하냐는 인사는 생리적 욕구와 안전의 욕구가 충족되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이러한 초보적 수준의 욕구가 충족돼야 인간으로서 사랑과 인정, 자아실현 등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동안 우리가 건성으로 안녕하냐는 인사를 주고받은 것은 어찌 보면 생리적 욕구와 안전의 욕구는 쉽사리 충족될 수 있었기 때문에 커다란 관심사가 되지 못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오히려 나는 잘 지내는데 너도 당연히 잘 지내고 있겠지 하는 정도의 가벼운 확인 정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사정이 바뀌었다. 외환위기 때부터 20대 80의 사회가 운위됐고 이조차 갈수록 기울어 10대 90, 1대 99로 곤두박질 쳐왔다. 사회의 많은 구성원들이 그 동안 경제성장의 흐름 속에서 당연한 것으로 간주했던 취업, 결혼, 내 집 마련 등이 어려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자본주의의 끊임없는 위기 속에 삶의 물적 토대를 이뤘던 기둥들이 하나씩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삶의 기반이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단순히 먹고 마시는 일이 더 이상 단순해지지 않았다. 안전한 울타리와 지반이 흔들리고 무너지면서 삶은 극도로 위험해지고 있다. 자아실현은 그야말로 언감생심이다. 전쟁과 절대빈곤을 겪었던 시대처럼 다시 서로의 안녕을 물어야 하는 시대로 회귀하고 있다.


갈수록 팍팍해지는 삶 속에서 사람들은 철옹성처럼 건재한 이른바 철밥통들에 대해 시샘하기 시작했다. 공무원, 교사, 교수처럼 안정적인 신분, 노후의 연금이 보장되는 직업에 대해서 삐딱하게 바라보기 시작했고, 이들의 무능과 비리를 들춰내는 언론의 보도는 사회로부터 환호를 받기 시작했다. 교육, 복지, 문화 등과 같이 본질적으로 비영리이며 공익적인 영역에서도 자본 따라 하기, 시장 본받기가 강요됐다. 경쟁과 효율이 전가의 보도처럼 휩쓸기 시작했다.


대학의 낭만과 상아탑은 이제 전설이 됐고, 대학에도 비정규직의 문제가 심각하게 드러나고 통폐합과 구조조정이라는 쓰나미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철밥통에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이제 밤새 안녕했는지 물어야 하는 상황이 됐다. 학생들은 취업을 못해서, 교수들은 업적량 쌓기와 신입생 및 재학생 충원, 폐과 등을 걱정하며 전전긍긍해야 하는 상황이 오고야 말았다. 교수는 정년을 걱정하고, 당장 연구는 둘째 치고 강의를 할 수 있는지 걱정하게 됐다. 학문의 자유,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는 점점 배부른 소리가 되고 있다. 매슬로우가 말하는 자아실현의 욕구를 추구하는 최고 지성의 집단에 속한다는 교수들이 이제 가장 초보적인 생리적 욕구와 안전의 욕구 충족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이제 진정으로 여쭙겠습니다. 전국의 교수 여러분, 안녕들 하십니까?

□ 추천 릴레이 에세이 다음 호 필자는 홍성필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입니다.



윤찬영 전주대·사회복지학과
필자는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비판과 대안을 위한 사회복지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월간 <열린전북> 발행인으로 있으며, 지은 책으로는 『사회복지법제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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