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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E-A의 속도로 사라지는 문학의 추억
LTE-A의 속도로 사라지는 문학의 추억
  • 손종업 서평위원/선문대·국어국문학과
  • 승인 2014.02.10 16: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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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라고 시인 황지우가 노래할 때, 우리는 문득 깨닫는다. 이제 시인이 노래한 그 경험들이 우리에게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는 이 무작정의 기다림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더 친숙한 말은 차라리 “지금 어디야?”라는 말이다. 약속장소에 먼저 도착하거나 늦게 도착할 수는 있지만, 절대적인 부재 속에서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 또는 그녀는 지금 여기에는 없지만 어딘가에 있음을 우리는 유비쿼터스하게 확인한다.


비어있는, 무료한, 완벽한 침묵의 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하철을 타고 가노라면, 이제 책을 읽는 사람을 발견하기 어렵다. 황혼이 내리는 차창 밖 풍경이나 자신의 곁을 스쳐가는 어떤 인연들에게도 무심하다. 현대인은 기계장치를 통해 어딘가에 링크돼 있다. 어떤 결핍들이 찾아들지만, 그것은 지극히 짧은 순간의 터치만으로 쉽게 채워진다. 모든 것은 너무 빠르고 쉽고 흥미롭다. 어느 자리에 앉아 오래 누군가를 기다리기는커녕, 사랑하는 이와 함께 앉아서도 자꾸 어떤 완벽한 링크상태를 그리워하게 된다. ‘그림 없는 두꺼운 책’을 읽는 일은 번거롭고, 쓸데없고, 효율성이 떨어지는 일로 전락한다.


그렇다. 서두에 인용한 시인 황지우의 시는 오로지 휴대전화가 없는 순간에만 가능한 어떤 경험을 다루고 있다. 휴대전화는 그 표면을 만질 때마다 나타나서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라고 묻는 항아리 속의 거인 지니와 같다. 언젠가 휴대전화를 통해 정보검색이 가능해진 순간을 그린 국내업체의 휴대전화 광고를 생각해 보자. 한 아리따운 여인이 달려가는 열차 안에서 책을 읽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오로지 여인의 아름다움에 취한 젊은이가 그 책을 읽었을 리 없다. 그는 휴대전화를 꺼내 무언가를 찾아보고, 아가씨에게 다가가서 은밀하게 묻는다. “노르웨이의 숲엔 가 보셨나요?” 그의 영혼이 그 말을 이해할 리 없다. 과학기술혁명은 당시의 휴대전화를 구석기 시대의 유물 같은 것으로 만들어놓았다. 이제는 창가에 앉아 책을 읽던 여인의 모습도 사라지고 없다. 아마도 그 여인도 소설을 읽어오라는 과제를 받으면 인터넷 검색을 통해 몇 가지 정보를 얻어내는 것으로 만족하리라. 이렇듯이 휴대전화 속의 거인 지니가 전지전능한 상태에 이르는 것을 현대인은 자신의 능력으로 착각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문학의 가장 무서운 적수는 휴대전화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문학이 놓여 있었던 자리에 들어앉는다. 문학은 ‘문자’로, 어떤 거대한 정보의 더미로 대체된다. 사람들은 써서 보내고 읽고 답하는 끊임없는 행위들 속에서 헛배가 부르고 비만해진다. 급속도로 팽창하는 정보들의 양에 압도된 현대인들은 선택적으로 읽고, 표면들을 빠르게 훑고 지나가는 것에 만족한다. 무언가를 천천히 咀嚼하며 그 숨은 의미를 찾고 어떤 성찰과 느낌에 이르는 일은 차라리 비효율적인 일로 여겨진다.


휴대전화는 속도에 대한 강박을 통해, 진정한 의미를 찾기 위한 모색과 기다림의 시간들을 없애버린다. 우리는 더 이상 길을 잃은 채 헤매지도 않고, 무작정 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지도 않는다. LTE-A의 광속으로 흐르는 영화를 보면서도, 가끔씩 습관적으로 휴대전화를 꺼내드는 탓에 영화관은 완벽한 어둠에 잠기지 못한다. 마치 지상의 불빛 때문에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하늘의 별빛처럼 문학은, 시는, 흐릿하게 사라진다. 나뭇잎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려올 리 없다.


젊은 날 거리에는 다방들이 그렇게 많았다. 요즘은 그 자리에 커피전문점들이 자리 잡았는데, 얼핏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그 장소의 성격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다방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장소였던 반면, 커피전문점은 함께 들어가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휴대전화는 고요 속에서 기다리는 일을, 길을 잃고 헤매는 낭패감을 없애주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어떤 진정한 의미를 찾아가는 순례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 버렸다.


주지하다시피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Godot)를 기다리며』는 대표적인 기다림의 서사다. 이 희곡 속의 주인공인 블라디미르와 아라공은 끊임없는 반복과 변주 속에서 의심하고 회의하면서도 고도라는 존재를 기다린다. 작가 자신의 회고에 따르자면 고도는 신(God)일 수도 있고, 개(dog)일 수도 있다. 하지만 기다리는 일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
아마도 현대인들은 검색할 수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휴대전화를 흔들어보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금강산 여행이 가능했을 때, 월경사무소를 지나 다시 남쪽 경계로 들어선 관광객들이 일시에 휴대전화의 전원을 켜는 장면은 우리가 어떤 세계에 로그인된 존재라는 느낌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북한에서조차 휴대전화가 급속히 퍼지고 있다고 하니, 이러한 추세를 거스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래도 가끔씩은 그것을 꺼야 낯선 세상을 만날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로그인된 존재로서 현대인은 아무 것도 기다리지 않는다. 그리고 긴 기다림이 없는 곳에 문학은 존재할 수 없다.

손종업 서평위원/선문대·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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