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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학위수여식 격려사
작은 학위수여식 격려사
  • 교수신문
  • 승인 2014.02.10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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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릴레이 에세이

 

내가 몸담고 있는 학과에서는 우리만의 작은 학위수여식을 열어온 지 오래 됐다. 대학 전체의 썰렁한 학위수여식에서 졸업생 개인의 존재가 미미하게 되는 것이 안타까워 시작한 것이다. 그런 시도가 대학 안에서 꽤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것 같은데 그 뒤로 학과 별 학위수여식이 우리 대학의 관례가 됐다.
식장에는 졸업생의 가족 친지들이 반 이상의 자리를 차지한다. 면면이 또렷하게 보이는 가까운 자리에서 올리는 의식에서의 언행은 참 예민하고도 특별하게 서로에게 전달된다. 학과 규모가 작아서인지 재학시절 선후배간 추억을 세세하게 담는 송사는 심금을 울리기도 한다. 교수들은 졸업생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해 앞으로 나오게 하고 학위증을 전달할 뿐 아니라 졸업생의 소회를 듣는다. 흐느끼는 졸업생이 적지 않다. 부모님에 대한 대목에서 많이들 흐느낀다.


그들을 향한 교수의 격려사도 간단찮은 절차다. 우선 형식적인 확인과 추인의 대목을 넣는다. 졸업생들은 소정의 교육과정을 온전하게 거쳤기에 교사가 될 능력을 갖춰 당당하게 학위를 받게 됐다는 형식적 언어들도 그 자리에서는 실감과 감흥을 일으킨다. 나도 모르게 ‘면접시험 볼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라는 수사를 빠뜨리지 않는다. 췌사이지만 그 순간에 가장 지배적인 감정을 다 담을 수 있기에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다.


그리고는 4년간의 교실을 회고한다. 나에게는 학습자의 위계라는 개념이 없다. 나는 지금까지 최고 수준의 학습내용을 최대치로 가르쳐왔다. 나는 나의 제자가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생이라는 것을 회의하지 않았다. 내가 가르치는 제자의 수준을 냉정하게 평가하고 평가 절하하는 순간 선생으로서의 초심을 상실하는 것이라며 언제나 나를 타일러 왔다. 다만 여력이 미치지 못해 내가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이것만은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니 안타까운 노릇이다. 이런 말을 꽤나 진지하게 한다.


내가 진정으로 놓치지 않고 힘주어 들려주고 싶은 것은 소학에 나오는 伊川 선생의 말씀이다. “사람에게는 세 가지 불행이 있는데, 소년에 高科에 오르는 것이 첫째 불행이요, 부모형제의 위세에 의지해 좋은 관직을 얻는 것이 두 번째 불행이요 재주가 많고 문장에 능한 것이 세번째 불행이다(人有三不幸, 少年登高科, 一不幸, 席父兄之勢, 爲美官, 二不幸, 有高才能文章, 三不幸也.)”라는 구절이다. 특히 첫째에서 언제나 감동한다. 이 감동을 꼭 아끼는 사람에게 전하고 싶었다. 실패를 경험하고 변변찮은 자기의 능력을 감지하게 되는 것은 얼마나 소중하고 가슴 떨리는 일인가. 거듭된 좌절이 마침내 나의 망가짐과 앞날에 대한 절망으로 나를 이끌어갈 때, 그래서 이 세상에서 어떤 출구도 보이지 않을 때의 기억을 가진다는 것. 그 기억이 매 순간 나를 다잡고 나를 담금질하고 나를 깨어 있게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런 절망과 망가짐의 경험이야말로 사람을 나약하게 하지 않고 타락하지 않게 하고 거드름 부리지 않게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 대목을 이야기할 때 나는 참 행복하고 흐뭇했다.


그런데 요즘 들어 그런 말을 하는 나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취업률에 대한 사람들의 부담과 집착이 도를 넘어섰다. 대학 본부에서는 매주 학과별 취업률을 통계내어 전 교수들에게 보낸다. 대학 시험 응시생의 부모조차도 학과로 전화를 걸어와 학과 졸업생들의 취업률을 확인한다. 어릴 적부터 오직 교사되기만을 꿈꾸어온 대부분의 우리 학과 학생들은 임용고사에 합격하는 서원을 한시도 그친 적이 없다. 졸업한지 3, 4년이 되도록 어떤 일도 다 미루거나 포기한 채 임용고사 준비에만 몰두하는 졸업생들이 많기에 임용고사 경쟁률은 나날이 높아만 가고 그래서 졸업하는 해 합격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렵다.

당장 저 좁은 학위수여식장에는 몇 안 되는 임용고사 합격자와 대다수의 불합격자가 섞여 앉아 있다. 그런 졸업생들이 ‘고과’ 급제가 가장 심각한 불행이라고 말하며 감동하고 있는 이 선생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에 잠기는 것일까? ‘아, 나는 그래도 불행해지지 않구나’하며 불합격생은 힘을 얻을까? ‘나의 불행은 이제부터이구나.’하며 합격생들은 행복한 고민에 빠질까? 그보다는 ‘저렇게까지 궤변을 늘어놓지 않아도 되는데’하며 불합격자들이 입맛을 씁쓸히 다실 것만 같다. ‘잔치 자리에 재를 뿌리기까지 해야 하는가?’하며 합격생들이 못마땅해 할 것만 같다. 학부형들은 자기 자식을 빈손으로 내보내는 교수가 스스로를 구차하게 변명하고 있구나 라며 내 속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을 것만 같다. 한줄 서기의 맨 앞자리를 차지 못한 자기 자식을 조롱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만 같다. 아, 어느 땐가부터 졸업식 격려사를 하는 마음이 편하지 못하고 행복하지가 않게 됐다.


‘殺活自在’라 했다. 살리고 죽이는 것, 긍정하고 부정하는 것, 많고 적은 것. 이 양변들이 주체의 처지에 따라 적재적소 바람직하게 선택돼야 하는 법. 그것이 양변의 치우침을 넘어서는 中道다. 부정적 생각이 강한 사람에게는 긍정적 생각이 더 필요하고, 많기만 한 사람에게는 적어지는 법을 터득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부디 청년이 일찍 잘되는 것이 불행이라는 말씀이 불합격한 제자들에게는 따뜻한 위로의 수사가 되고 합격한 제자들에게는 따끈한 경책의 수사가 되는 살활자재의 기적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대해본다. □ 추천 릴레이 에세이 다음호 필자는 정효구 충북대 교수입니다.


이강옥 영남대·국어교육과
필자는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구운몽의 불교적 해석과 문학치료교육』, 『한국야담연구』등을 저술했다. 곧 『청구야담』 번역본을 내고 야담의 주제와 가치에 대한 저서를 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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