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쥘 베른과 21세기
쥘 베른과 21세기
  • 박아르마 건양대·불문학
  • 승인 2015.09.15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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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박아르마 건양대·불문학

세상에는 읽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읽지 못한 책이 있다. 대개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나 톨스토이의 『부활』과 같이 천 쪽을 넘나드는 고전이 바로 그런 경우에 속한다. 반면에 읽겠다고 결심하고서도 쉽게 도전하기 어려운 책이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이 그러하다. 또 한편에는 읽었지만 제대로 읽지 못했거나 ‘가벼운 독서’로 치부하고 마는 책이 있다. 우리가 어린시절에 요약된 아동문학으로 읽은 책들, 예를 들어 다니 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나 쥘 베른의 과학 소설들이 이 경우에 속한다.

프랑스 낭트 출신의 작가 쥘 베른(Jules Verne,1828~1905)은 모험소설과 공상과학 소설 작가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고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번역돼 읽히는 작가들 중 한 사람이다. 반면에 ‘모험’과 ‘공상과학’이라는 수식어와 더불어 그가 가지고 있는 대중성은 오히려 그의 작품에 대한 문학적 평가를 가로막고 작품이 진지한 문학적 성찰의 대상이 되는 데 부정적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쥘 베른의 작품을 ‘가벼운 독서’의 대상으로만 보기에는 그가 보여준 과학의 미래와 자연의 문명화, 자연과 인간에 대한 성찰이 너무나 깊고 진지하다.

쥘 베른의 『신비의 섬』에서는 과학자 사이러스 스미스의 과학적 지식이, 『2년 동안의 휴가』에서는 소년들의 용기와 ‘능수능란함’이 난파자들의 무인도에서의 생존을 가능하게 한다. 기술자 사이러스 스미스는 당대의 과학적 지식을 총동원해 그릇부터 철, 화약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스스로 만들어낸다. 그의 기술자로서의 능력에는 동시대의 모든 과학기술이 집약돼 있다. 작가는 인간 더 정확히 말해서 문명인의 지적·기술적 능력에 대한 신뢰를 거의 무한대까지 밀고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과학의 발전과 자연의 정복이 인간에게 무한대의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19세기적 낙관론을 비판하면서 그를 그 대표 인물로 꼽는다. 말하자면 그는 뛰어난 상상력과 과학적 지식을 토대로 과학의 발전이 가져올 미래를 예측한 놀라운 예지 능력의 소유자로, 문명화와 자연의 정복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진 수많은 환경 파괴를 내다보지 못한 근시안적인 인물로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는다.

사실 쥘 베른은 그의 작품 어디에서도 과학의 발전이 가져올 미래에 대해 무조건적인 낙관론을 펴거나 인간에 의한 자연의 정복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소설 『신비의 섬』에서 ‘난파자들은 섬의 문명화 혹은 식민지화에 성공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우리는 유보적인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비의 섬』의 후반부에 이르러 섬의 폭발을 목격하게 되기 때문이다.

과학자 사이러스 스미스가 중심이 된 노력으로 문명화가 거의 이뤄진 듯싶었던 링컨 섬은 화산 폭발이라는 자연의 힘 앞에서 무기력하게 파괴되고 만다. 이 사건은 섬의 소유화 혹은 문명화 작업의 불가능성과 자연의 질서 앞에서 무기력한 인간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자연의 힘 앞에서 식민지 주민들은 자신들의 무력함을 드러내고 모든 것을 상실한 채 완전한 무의 상태로 돌아간다. 『신비의 섬』의 등장인물들은 그들의 운명을 ‘신에 맡긴 채’암초 위에서 외부 세계에서 올지도 모를 구원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다. 우리는 쥘 베른이 구원의 외재성과 섬의 폭발을 통해 ‘자연에 대한 인간의 도전을 심판’하려고 했다는 섣부른 결론을 끌어내기는 어렵다. 그가 과학기술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고 있다는 해석을 내리는 것도 과학소설의 선구자로서의 그의 작업을 폄하하고 왜곡하는 것
이다.

다니엘 디포의 소설의 주인공, 로빈슨 크루소가 인간의 힘으로 자연을 정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최초로 구현한 인물이라면, 프랑스 작가 미셸 투르니에의 소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의 주인공은 그것의 불가능함을 깨닫고 자연에 동화돼 살아가는 길을 선택한 21세기적인 인물이다. 쥘 베른은 과학의 발전이 가져올 미래를 예측하면서도 자연의 힘 앞에서의 인간의 무기력함을 보여준 작가다. 오늘날 로빈슨 크루소와 사이러스 스미스의 후손들인 유럽인들이 친환경적인 삶을 가장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고, 자연과 더불어 살던 프라이데이의 후손들인 저개발 국가의 국민들이 산업화와 성장에 목말라 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박아르마 건양대·불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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