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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핵과 반핵, 그리고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
탈핵과 반핵, 그리고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
  • 교수신문
  • 승인 2015.10.05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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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전진성 부산교대·사회교육과
▲ 전진성 부산교대 교수

“있을 법한 일은 일어나고, 있을 수 없는 일도 일어난다.” 후쿠시마원전사고 정부조사위원장을 맡았던 하타무라 요타로 도쿄대 명예교수는 이 사고에서 짚어볼 점의 하나로 인간 능력에 대한 과신을 꼽았다. 일본의 기술력에 대한 맹신에 기초한 도쿄전력의 안전신화가 불의의 재해로 인한 장시간 전원 상실의 가능성을 무시했다는 것이다. 김해창 경성대 교수의 저서 『탈핵으로 가는 길 Q&A: 고리1호기 폐쇄가 시작이다』 (해성, 2015)에 나오는 말이다.

<국제신문>과 (사)시민정책공방 공동기획으로 출간된 이 책은 환경공학자이자 탈핵운동가인 저자의 전문성과 다년간 경험에 입각해 핵발전소(원전)의 안전성에 대한 통념을 조목조목 문제 삼는다. 핵발전소가 의외로 자연재해나 테러 등에 취약하다는 점, 방사능 오염이 어린이나 여성에게 훨씬 피해가 크다는 점, 핵발전소가 결코 값싸지 않다는 점 등을 명확한 논거를 들어 설명해줄 뿐만 아니라 왜 고리1호기가 그토록 잦은 사고를 냈는지,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원전사고는 어떻게 해서 일어났는지, 실질적인 원전 방호방재대책을 어떻게 세워야할지, 일단 사고가 터지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구체적인 지침을 제공한다. 분량은 적은 편이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더욱 가방 속에 늘 구비할 탈핵운동의 지침서라 할만하다.  

2015년 6월 12일 고리1호기 ‘영구정지’ 결정이 이뤄졌다. 이는 탈핵사회를 향한 최초의 한 걸음을 내디딘 것으로 부산 시민사회가 이뤄낸 쾌거임이 분명하지만 샴페인을 터뜨리기에는 너무 이르다. 향후 폐로과정에서 갖가지 문제점이 불거질 것이 자명하며 그밖에도 수명을 다해가는 노후 핵발전소들이나 신규 핵발전소 건설 계획이 미래의 전망을 불투명하게 하고 있다. 현재 밀양 송전탑을 철거하려는 주민들의 투쟁과 고리원전의 갑상선암 집단 소송이 진행 중이며 핵발전소 건설 저지를 위한 주민투표를 성사시켰던 삼척의 선례에 따라 경상북도 영덕에서도 주민투표가 준비되고 있다.

‘고리1호기 폐쇄’를 넘어 ‘탈핵으로 가는 길’은 참으로 험난한 길이다. 그것은 대안에너지를 강구하는 공학적 문제인 동시에 시민불복종 내지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장이며, 보다 근본적으로는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를 쟁취하는 문제다.

탈핵 운동이 반핵 운동과 함께 가야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전자는 핵발전소, 후자는 핵무기를 타깃으로 삼지만, 핵의 평화적 이용과 군사적 이용이라는 이분법 자체가 냉전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 핵발전소와 핵무기가 동일한 우라늄 원자를 사용하며 핵분열의 속도만을 달리한 결과라는 사실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 아닌가. 탈핵 운동과 반핵 운동은 삶의 권리를 수호하려한다는 점에서 모두 인권 운동의 범주로 귀속시켜야 마땅하다. 에너지정책이나 군사정책을 바로잡는 일도 중요하지만 ‘국가’의 틀 안에 갇혀 사고하기보다는 국가에 의해 결코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는, 오히려 위협받기 쉬운 인간 삶의 취약성에 주목하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양 운동의 출발점이다.

미국의 소설가 겸 저널리스트 존 허시의 저작 『1945 히로시마』 (책과함께, 2015)는 반핵평화운동가들에게는 고전으로 꼽힌다. 1946년 8월말 <뉴요커>에 개제한 기사를 바탕으로 한 이 책은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후 생지옥에서 살아남은 6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들은 유명인사가 아니다. 공장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 목사, 독일인 신부, 홀로 아이를 키우는 미망인, 그리고 의사들이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상공 위에 ‘소리 없는 섬광’이 번뜩이면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의사인 후지이 박사는 병원의 대들보에 짓눌린 채 강물로 처박혔고 가난한 미망인 나카무라 부인은 집 더미에 파묻혔으며 공장 노동자 사사키 양은 책장이 엎어지면서 책 더미에 다리가 꺾여 부러졌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구원의 손길을 뻗친 것은 적십자병원의 사사키 박사나 다니모토 목사, 예수회 사제들과 같은 현장의 생존자들이었다. 생사를 가른 것은 국가의 방재 시스템이 아니라 ‘여러 번의 소소한 우연과 결단’이었던 것이다. 미증유의 재난에 직면하여 속수무책인 정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별로 낯설지 않은 광경이다.

이제는 정부를 좀 믿어보라고? IQ 테스트 하려는가. 설령 ‘좋은(?)’ 정부가 만들어지더라도 국가권력과 인권이 마치 이혼을 앞둔 부부관계와 같다는 것은 인류사의 교훈이다. 군사적 이용이든 평화적 이용이든 그 어떠한 핵분열도 국가권력과 인권의 분열을 재촉할 것이다. 탈핵·반핵 운동이 기본적으로 인간의 생명권을 수호하려한다면 국가권력의 정당성에 대한 물음으로 나아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김해창 교수에 따르면, 앞서 소개한 하타무라 요타로 교수는 후쿠시마원전 사고에서 배울 교훈의 하나로 다음과 같은 점도 지적했다.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고, 판단해 행동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날로 잊혀져가는 세월호 사건이 새삼 떠오른다.

전진성 부산교대·사회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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