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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화해에 맞서는 예술의 힘
거짓 화해에 맞서는 예술의 힘
  • 전진성 부산교대·사회교육과
  • 승인 2016.01.19 16: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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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누구나 원하는 만큼 가져갈 수 있도록 낱개로 포장된 사탕들이 전시장 바닥에 가득 쌓여있는 설치작품 「러버 보이」, 머리가 잘리고 목에는 칼자국이 선명하며 풍만한 네 개의 젖가슴을 가진 검은 대리석 조각품 「암여우」, 관객들이 차례로 무대 위로 올라와 여인의 옷을 가위질하는 「컷 피스(Cut Piece)」 공연, 천장과 바닥 위의 방울들이 선풍기 바람에 너울거리며 짤랑거리는 설치작품 「귀신 간첩 할머니」, 울퉁불퉁하고 흉측한 느낌을 주는 검은 크리스탈 덩어리인 「해빙(다카키 마사오)」 등은 언뜻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미술작품들이다. 소장 미술사학자 우정아의 저서 『남겨진 자들을 위한 미술』 (휴머니스트, 2015)은 전혀 다른 개인적, 역사적 배경을 가진 미술가들의 사례를 통해 치유될 수 없는 트라우마에 대해 예술이 맡을 역할이 무엇인지 묻는다. “현대미술은 어떻게 이별과 죽음, 전쟁과 재해를 치유하고 애도했는가?”라는 의미심장한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쉽사리 재현될 수 없는 고통과 상실에 대한 미술적 재현을 주제로 삼았다.

이 책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보다 마치 목에 가시가 걸린 듯 우리를 심히 불편하게 만드는 작금의 사태 때문이다. 일본 대사관 건너편에 자리 잡고 있는 평화의 소녀상이 상식 밖의 ‘외교적 합의’로 인해 존폐의 기로에 섰다. 이른바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라는 사과 아닌 사과가 정작 돌이킬 수 없는 피해당사자들의 경험을 무화시키려하자 공분의 열기 속에서 순식간에 이 다소곳한 소녀상은 민족적 수난의 명징한 도상으로 떠올랐다. 밤을 지새워서라도 반드시 지켜내야 할 민족적 자존심이여! 그렇지만 이 동상에 부여되는 그러한 의미가 실로 합당한지는 따져볼 일이다. 굳은 표정으로 양손을 모은 채 버티고 앉아있는 이 소녀상이 대변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쿠바 출신의 미국 작가 팰릭스 곤살레스 토레스의 1991년 작품 「러버 보이」는 에이즈로 세상을 떠난 연인을 위한 무형의 기념비이다. 사탕을 빨아먹는 행위는 말초적 쾌락에 순응하는 동시에 덧없이 사라져가는 우리 몸에 대한 보편적 메타포다. 작가는 작품에 대한 소유권이나 통제력을 갖지 않고 관람객 저마다의 상이한 기억들이 교감을 이뤄가도록 주선한다.

성도착증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암여우」는 아들에게 자신의 姓을 물려줄 만큼 자의식이 강했던 프랑스 여성작가 루이즈 부르주아의 1985년 작품으로, 검은 대리석의 토르소가 참으로 흉측하면서도 우울하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 자기를 배신했던 어머니에 대한 복수이자 애도를 미술이라는 방식을 통해 실행한 것이다. 존 레논의 연인으로 유명하게 되는 오노 요코가 1964년 교토에서 벌인 공연인 「컷 피스」는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의 옷을 자르게 만드는 지극히 가학적인 행위예술이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어린 그녀를 사로잡았던 트라우마가 그로테스크하게 재연된 것이다. 그것은 육체적 고통과 파괴를 부르는 폭력이 결코 한 개인을 집단적 부활이나 완전한 공동체로 이르게 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양혜규의 2014년 설치작품인 「귀신 간첩 할머니」와 이불의 2007년 작품인 「해빙(다카키 마사오)」는 모두 개인적인 동시에 역사적인 경험과 기억을 담고 있다. ‘대일본제국’에 충성을 맹세했던 군인 박정희의 개발독재 유토피아에 억눌려왔던 망령과 주검들이 방울소리와 불투명한 사물의 모습으로 귀환한 것이다. 뼈저린 고통과 실패의 기억을 담은 낯선 과거의 형상은 과거와의 거짓 화해를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든다.
좌절의 시대가 깊어갈수록 예술의 역할은 더욱 절실해진다. 예술은, 우정아의 표현에 따르면, 상실과 고통의 경험이 ‘결코 절대적으로 안락한 공동체로 수렴되지 않도록’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소박하기 이를 데 없지만 전혀 호락호락해 보이지 않는 소녀상은 바로 그러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다. 한일양국 간의 거짓 화해에 맞서 정치권력으로는 결코 봉합할 수 없는 치명적인 상처를 환기시키는 미술품이다.

일본대사관을 바라보는 지금의 위치에 소녀상이 버티고 있어야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관점에 따른다면, 소녀상의 철거는 물론, 유사한 동상을 도처에 세우자는 주장 또한 수긍할 수 없다. 사악한 정치권력에 공분한 나머지 자칫 민족적 수난의 상징물을 수호한다는 논리로 치닫게 된다면, 정작 소녀상이 지녔던 특유의 가치는 사라지게 된다. 할머니들의 고통과 상실은 어떠한 대리물을 통해서도 쉽사리 ‘승화’돼서는 안 된다. 『남겨진 자들을 위한 미술』은 프로이트가 말했던 ‘운하임리히(unheimlich)’라는 독일어 개념―영어로는 언캐니(uncanny)―을 논하며 남겨진 자들인 우리의 일상적 공간을 낯설고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미술의 참된 힘이라고 말한다. 유일무이한 미술품인 평화의 소녀상은 우리 목에 걸린 가시로 남아있어야 한다.

 

 

 

전진성 부산교대·사회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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