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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종교재단 사학의 신앙경력증명서 어떻게 볼 것인가
[해설] 종교재단 사학의 신앙경력증명서 어떻게 볼 것인가
  • 손혁기 기자
  • 승인 2002.12.2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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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째 시간강사를 하며, 교수임용공고를 유심히 살피고 있는 ㄱ씨, 몇 달 전 자신의 전공분야에 꼭 맞는 자리를 발견했다. 학생들의 수준이나 재직하고 있는 교수들에 대한 대우를 고려해 봐도 가능하다면 꼭 임용될 수 있기를 바랬다.

그러나 ㄱ씨는 서류를 준비하면서 예상치 않은 곳에서 난관에 부닥쳤다. 기독교계통의 재단에서 설립한 이 대학은 신임교수를 임용하면서 제출서류에 본인의 종교생활과 종교관, 목사의 추천서까지 요구했던 것이다. 임용이 되더라도 정기적으로 학내 종교행사에 참여해야 하는 등 대학운영에서도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주변사람들은 남들도 다 그런다며 목사를 소개해 줄 테니 대충 서류를 꾸며서 제출하라고 했다. 그러나 믿지도 않는 종교를, 그것도 충실한 신앙인인 것처럼 거짓서류를 꾸민다는 게 양심에 걸렸다. 갈등하던 ㄱ씨는 결국 서류제출을 포기했다.

대학의 특정종교 강요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대학으로 꼽히는 숭실대를 기독교 재단이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현재 전국의 1백37개 일반 사립대학 가운데 40여개 대학이 신임교수 임용과정에서 특정종교를 요구하고 있다. 배재대, 숭실대, 연세대, 호서대 등이 신임교수 임용서류에서 종교 기록서, 신앙 확인서 등을 받고 있으며, 목원대 등은 목사의 추천서를 구비하도록 하고 있어 실질적으로 비 종교인의 지원을 배제하고 있다. <도표참조>완전히 다른 종교인을 배제하지 않더라도 천안대는 면접 점수에서 기독교세례인 5점, 기독교 4점, 천주교 3점, 무종교 2점 등 차별을 두고 있었다. 또 종교를 강요하지 않더라도 대구가톨릭대, 덕성여대, 서경대, 선문대, 세종대, 이화여대 등은 지원서에 종교를 기재토록 하고 있다.

반면, 종교재단이기는 하지만 대진대는 다양한 종교를 인정하고 있으며, 성공회대는 임용이후 계약할 때 ‘대한 성공회의 신앙과 전통을 존중한다’는 서명만을 요구하고 있어 대조를 보였다.

그 동안 사학의 설립자가 특정종교재단이고 사학이 설립자의 건학 이념을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을 전제로 사립대가 신임교수 임용에서 특정 종교를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이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는 종교의 자유를 규정한 헌법 제 11조에 근거해 평등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내놓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 관계자는 “진정이 들어올 경우 위원들이 판단할 문제이지만 법인이나 私人이 종교에 따라 응시의 제한을 두는 것은 조사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종교재단이 설립했더라도 신학대학이 아니라 보편적인 학문을 교육하는 기관이라면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인권위원회의 판단이 아니더라도 종교재단이 운영하고 있는 대학에 재직하고 있는 교수들을 고려할 때 특정종교를 강요하는 것은 학자의 양심이라는 측면에서 재고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ㅇ대학에 재직하고 있는 김 아무개 교수는 임용될 당시 근처에도 가보지 않았던 교회에서 세례증명서를 받아 지원서를 냈고 별 문제 없이 임용돼 강의를 하고 있다.

ㅇ대학이 운영에서는 비교적 종교색이 강하지 않아 김 교수는 임용 이후에 이러한 것을 잊고 지내지만 “양심을 속이고 잘할 수 있는가”라는 반성과 “누구나 존경하는 대학교수가 되는 일”이라는 현실적인 유혹 사이에서 갈등했던 것은 결코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대학도 형식적인 절차에 그치고 만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지만 이로 인해 지금도 일부 연구자들은 양심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을 하고, 자신의 양심을 애써 외면하고 현실을 따르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사학에 대한 정부의 지원금이 확대되면서 종교를 제한하는 것을 재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더욱 높아지고 있다. 최근 교수·연구원 채용정보사이트 하이브레인 넷(www.hibrain.net)에서는 한국학술진흥재단이 급여를 지원하는 연구교수를 선발하면서 종교증명서를 요구한 것이 논란을 빚었다. ‘조용한’이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는 이용자는 “‘모든 국민’이 세금을 내는 ‘학진 예산’으로 사람을 뽑으면서 ‘특정종교’인으로 제한하고 있다”며 재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학의 자주성과 대학의 공공성, 종교재단의 설립이념과 교육의 보편성, 학자의 양심과 안정된 자리, 그 사이에서 오늘도 학문후속세대들은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손혁기 기자 pharos@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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