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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여름 떠나는 자리 
뜨거운 여름 떠나는 자리 
  • 방민호 편집기획위원/서울대·국어국문학
  • 승인 2018.08.27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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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방민호 편집기획위원/서울대·국어국문학

태풍 솔릭이 바야흐로 한반도를 빠져 나갔다고 한다. 제주도에 상륙할 때 그 기세등등하던 것이 한반도에 상륙, 내륙으로 들어오자 한결 누그러지면서 동해안 쪽으로 빠져 나갔다. 

올 여름처럼 뜨거운 때가 없었다는데, 무엇이 어떻게 얼마나 뜨거웠는지 알지 못하고 지냈다. 여름 내내 풀지 못하는 문제를 앞에 놓은 사람처럼 머리가 아플 뿐 더위 따위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여름이면 해거리로 앓던 고열의 일주일도 올해는 없었다. 육체보다 가슴이 더 시달린 여름은 그 끄트머리 태풍을 맞고서야 이제 떠나고 있음을 깨닫는다. 

오늘은 학교에서 한국학 심포지엄이 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 며칠째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뛰고 있음을 다시 느끼며 이번 일이 끝나면 병원에 반드시 가봐야겠다고 생각한다. 태풍이 빠져나간 뒤끝의 비는 차라리 상쾌할 뿐인데, 긴 더위에 시달린 수목들 이파리들이 오늘 따라 싱그럽다. 

학교 캠퍼스는 확실히 딴 세상이다. 얼마 전에 한 정치인이 석연찮은 죽음에 직면했던 것도, 한 도백과 영화배우 사이에 ‘진실’을 둘러싼 논란이 고조되고 있는 것도, 자영업자들의 폐업률이 무려 90퍼센트에 육박하고 청년 실업률이 사상 유례없는 수준에 도달한 것도, 대법원이 수년에 걸쳐 행정부 권력과 온갖 거래, 결탁을 해온 것도, 캠퍼스 안에서는 울림이 없어 보인다. 

깨끗하고 조용하고 여름의 숨 막히는 뜨거움조차 가신 캠퍼스 연못가를 거닐어 연구실 있는 건물을 향한다. 언덕바지 건물 2층으로 곧장 들어가 3층 복도를 지나치는데 한 선생님 연구실 문이 열려 있고 집기들을 정리하고 있다. 어제 그렇잖아도 이 여름 퇴직하시는 선생님 이야기가 오갔는데 새 학기가 오기 전에 연구실을 말끔히 비우고 있는 것이다. 

워낙 연세가 되고 초빙되듯 오셔서 십 년 계시고 오늘 떠나시는 선생님은 마침 연구실에 계시지 않다. 복도를 지나쳐 학과 사무실에도 안 계시다. 연구실에서 간단한 일들 마치고 학술 심포지엄 장소로 가는 길에 다시 들르자 이번에는 짐들 정리하시고 벌써 떠나버리셨단다. 비가 심하지는 않아도 아침보다는 제법 굵어졌는데. 

벌써 오래 전 이 세계로 처음 들어오던 때가 생각난다. 그때 동기동창 친구가 우리는 몇 년 남았다 하기에, 그런가 하고 말았다. 잘해 보자는 친구의 말을 고맙게 받아들고 사람마다 자기에게 주어진 과업이 있음을 가슴에 새겼다. 그러고 보니 이제 벌써 그 절반의 시간을 보낸 시점이다. 반환점을 돌아 후반기를 지나가고 있는 중이다. 

며칠 전, 학부 때부터 공부를 함께 한 학생, 이제는 어엿한 선생이 되었는데, 서울에서 나쁘다고 결코 말할 수 없는 학교에, 그 어렵다는 취직이 됐다. 박사학위를 받고도 여러 번을 떨어졌는데, 학위 받을 즈음 학술지 수록 논문이 벌써 십여 편에 달한 것이 효력을 본 것이다. 

대학에서 선생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어떤 사람은 사업을 하고, 어떤 사람은 농사를 짓는데, 이 사람들은 연구라는 것을, 가르친다는 것을 한다.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대학원 제도, 선발 제도를 거쳐 우여곡절 끝에 자리를 잡고도 어떤 곳에서는 재단 눈치, 윗사람 눈치 살피고 학생 모집에 신경 쓰며 알량한 자존심 하나, 연구실 한 칸에 의지하여 세상과 등을 지고 살아간다. 한 공간에 줄잡아 십 년, 이십 년씩 한 공기를 마시며 타인 냄새에 구토가 나올 지경이 되어도 떠날 수는 없다. 세상에 섞이고 싶을 때는 정치에도, 언론에도 기웃거려 보지만 돌아오는 비판, 비난이나 비아냥이 만만치 않다. 

홀로, 홀연히 오늘 짐을 꾸려 떠나신 선생님을 생각하며, 결국 믿고 의지할 것은 공부밖에는 없음을 실감한다. 한 사람으로서 완벽한 사람이란 있을 수 없고 보면 이 불완전함이 용인될 수 있는 단 하나 공통의 기준이 바로 각자 맡은 공부인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선생은 말없는 공부가 덕이 되어 이 세계로 오셨고 과묵하게 당신의 공부를 밀어 이 세계를 대과 없이 떠나실 수 있었다. 

학과 사무실에 들러 주인 없는 우산을 빌려 쓰고 학술회의장에 간다. 오늘의 주제는 ‘갈등, 화해, 그리고 기록’, 내가 속한 곳은 ‘한국의 전란과 문학의 대응’ 세션. 아직은 오전,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듣다 점심식사 후  발표를 한다. 회의장 안은 가라앉아 있다. 발표자도, 청중도 뜨거움은 각자의 안에 든 모양이다. 

나는 왜 지금 여기 앉아 있는가? 내 공부는 무엇이고, 세계와 어떻게 관계하고 있나? 여름 떠나는 오늘, 이것저것, 바쁘지 않은 상념에나 잠겨볼까 한다. 

 

방민호 편집기획위원/서울대·국어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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