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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정법 지위 잃은 국가보안법
실정법 지위 잃은 국가보안법
  • 곽병선 군산대
  • 승인 2003.10.1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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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로 세평

곽병선 / 군산대·형법학

법은 그 본질상 정치·사회적 변화를 앞장서 이끌고 나가기가 어렵다. 그 이유는 법의 심판 대상이 미래의 있어야 할 것이 아니라 과거의 있었던 행위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실정법에 대한 해석도 기존의 법이 폐지되거나 변경되지 않는 한 법 적용의 형평상 쉽게 그 내용을 변경할 수 없다. 따라서 법 집행기관 스스로 법해석과 법집행의 견해가 바꿔지기를 기대하기란 지난한 일이다.

최근 재독 사회학자 송두율 교수가 한국을 방문하면서 온 나라가 그의 법률적 처리문제로 설왕설래한다. 법무부장관은 송 교수가 북한의 노동당에 가입한 사실이 있다하더라도 남북의 고위급 인사들이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고 심지어 정상회담까지 한 마당에 그를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하는 것이 과연 국익에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라는 관점에서 처벌곤란이라는 견해를 표명한 바 있다. 이에 대해서 국가정보원이나 검찰에서는 송 교수를 처벌하지 않을 때 지금까지의 법 적용의 형평성과 국가보안법 자체가 무력화될 것이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처벌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국가보안법은 '반국가단체'를 명문으로 규정하고 있다. 즉 반국가단체란 정부를 참칭하거나 국가를 변란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국내외의 결사 또는 집단으로 지휘통솔체계를 갖춘 단체를 말한다. 대법원도 북한은 현 군사분계선 북쪽의 대한민국 영토를 강점해 대한민국의 통치권 행사를 방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을 전복하기 위해 무력도발행위를 계속하고 선전선동으로 대한민국 내부로부터의 붕괴를 지속적으로 획책하고 있으므로 반국가단체라고 일관되게 판시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의 상위법인 헌법은 북한을 평화통일의 대상으로 보고 있으며, 대통령에게 평화통일의 책무까지 부담시키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북한은 평화통일을 함께 이뤄야 하는 협상의 당사자이지, 반국가단체라는 범죄집단으로 보기는 어렵다. 더구나 1992년에 체결된 남북기본합의서는 남북양측이 서로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2001년 국민의정부에서는 남북 양 정상이 만나 앞으로의 평화통일방안에까지 의견접근을 보았다. 이처럼 남과 북의 정치현실은 서로의 존재를 상호 인정하는 수준까지 발전했으나 국가보안법은 여전히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50년 전의 냉전적 규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제 남북이 상호공존을 인정하고 평화통일을 추구하자고 합의한 마당에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의 존속여부를 공론화 할 단계가 됐다고 본다. 국가보안법이 폐지된다 하더라도 대한민국의 존립을 침해하는 범죄는 형법에 의해서도 처벌할 수 있다. 형법은 국가의 존립과 관계되는 범죄구성요건 즉, 내란죄, 외환죄, 여적죄, 이적죄, 간첩죄 등을 규정하고 있다. 다만 형법은 국가보안법과는 달리 반국가단체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외국'이나 '적국'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외국은 대한민국 이외의 정부를 말하고, 적국은 대한민국과 사실상 교전상태에 있는 외국이나 외국의 단체를 말한다. 남과 북은 아직 휴전상태에 있고, 북한이 이미 국제연합에 가입한 사실상의 국가이기 때문에 누군가가 북한을 위해 대한민국의 국가존립과 관계되는 법익을 침해하는 경우에는 형법상으로도 처벌이 가능하다. 물론 이 때는 명백한 침해사실이 증거로 제시돼야 한다.

독일의 사회학자 루만은 '실정법의 운명은 전체사회에 있어서 정치 시스템의 운명과 결부돼 있다'고 했다. 시스템은 환경에 따라 복잡성을 갖지만 진화의 과정을 거쳐 점점 안정화되고, 이러한 안정화로 나타난 것이 바로 실정법이라고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국가보안법은 우리 사회의 통합이나 안정보다는 분열을 촉진하고 있고, 우리 민족이 추구해야할 정치·사회환경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므로 입법적 결단을 통한 폐지여부를 공론화해야 할 시점이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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