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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의 대중적 기반 분석...'근대권력'과 '독재' 혼동
독재의 대중적 기반 분석...'근대권력'과 '독재' 혼동
  • 장문석 서울대
  • 승인 2004.06.1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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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서평 : 『대중독재』(임지현 외 편, 책세상 刊, 2004, 588쪽)

장문석 / 서울대 서양사

‘대중독재: 강제와 동의 사이에서’는 파시즘, 스탈린주의, 박정희 체제 등 각국의 20세기 독재의 경험들을 아우르는, 19편의 논문들로 구성된 풍성하고 흥미로운 연구서다. 저자들 사이의 미묘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관통하는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그 제목에서 명징하게 드러난다. 여기서는 ‘대중독재’라는 자못 도전적인 개념을 중심으로 쟁점들을 간추려 이 책을 읽은 감상과 소견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이 책에 따르면, 근대 독재는 “폭력과 억압이라는 악마적 이미지로 단조롭게 채색돼”왔으나, 실제로 그것은 “위로부터의 강제적 동원이 아닌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동원의 체제를 구축”했다. 이로부터 이 책은 20세기의 독재가 “강제와 폭력이라는 피상적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체제에 대한 대중의 동의”를 광범위하게 향유했다는 점에서 “대중독재”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안한다. 이런 시각은 파격적이기도 하고 평범하기도 하다. 파격적이라 함은 지금까지 독재라고 하면 으레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지배를 떠올리는 사고 습성을 깨뜨릴 것을 이 책이 주문하기 때문이다. 평범하다 함은 잘 생각해 보면 ‘순수한’ 민주주의에서도 경찰과 군대가 상징하는 강제력들이 엄존하듯이 모든 지배에는 동의와 강제의 계기들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강제’와 ‘동원’ 사이의 무인지대 탐색

그런데 독재라는 정치 환경에서 ‘동의’를 말하는 데에는 약간의 난점이 따른다. 과연 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동의’를 말할 수 있을까. 독재를 거부할 때 뒤따를 박해와 유배, 그리고 독재를 수용할 때 누릴 경력과 안정 사이에서 선택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런 환경에서라면 사람들은 어느 이탈리아 역사가가 말했듯이 “소수의 공공연한 반란자”이거나, 아니면 “겉으로는 어떤 것을 말하고 속으로는 다른 것을 생각하는 다수의 니고데모”이기 십상이다. 설령 ‘동의’를 말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거기에 존재하는 층위들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체제의 가치와 이상에 의식적이고도 자발적으로 점착하는 태도가 있는가하면, 자생적이고 조건부로 독재에 점착하거나 독재를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태도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들도 이런 ‘동의’의 모호함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가령 저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아코모다시옹(적응)”이라든지 “수동적 동의”, 혹은 “체념적 순응”과 같은 표현들이 그 점을 잘 보여준다. 또한 동의가 강제의 환경에서 이루어지고 강제가 동의를 배제하지 않는, 다시 말해 강제와 동의가 상호침투돼 있는 “역사 현실의 복합성”을 강조한다는 점도 저자들의 고민과 생각의 깊이를 보여준다. 여하튼 이 점과 관련해 중요한 것은 강제와 동의라는 이분법적 틀을 현실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일이 아니라 이 책의 부제가 보여주는 대로 “강제와 동의 사이에” 존재하는 광범위한 무인지대를 탐색하고 드러내는 작업일 것이다.

‘동의’의 문제처럼 명시적으로 드러나고 있지는 않지만, 이 책이 제시하는 또 다른 논점은 독재가 퇴행이나 정체를 대표하는 게 아니라 능동적인 변화의 도구였다는 것이다. 가령 독재가 모순적인 방식이기는 하지만 산업화와 근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대중들 사이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은 것은 사실이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파시즘이 기성의 사회적 가치와 구조를 근본적으로 뒤바꾸려고 한, 反 부르주아적이고 평등주의적인 ‘혁명적’ 잠재성을 갖고 있다는 견해도 낯익은 주장이다. 특히 이 책에서 인용된 이탈리아 역사가 에밀리오 젠틸레는 파시즘이 신화, 상징, 의식들을 활용하면서 새로운 인간형을 만들어내려는, 이른바 “인류학적 혁명”을 추구했다고 본다. 확실히 파시즘이 갖는 그런 ‘혁명적’ 차원들을 단순히 선전이나 수사로만 치부해서는 파시즘이 갖는 대중적 호소력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파시즘과 독재, 근대권력의 지형도 위에서 파악

그러나 여기서도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예컨대 이탈리아 파시즘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극히 이질적인 경향들의 ‘반죽’과도 같았다. 게다가 파시즘의 역사는 늘 까다로운 일련의 협상들과 타협들로 점철돼 있었다. 파시즘의 ‘혁명적’ 잠재성은 기성 제도들의 저항에 부딪쳐야 했고, 그럴 때마다 ‘포퓰리즘’과 ‘사회적 데마고기’의 요소들이 파시즘에 착종돼 있음이 드러나곤 했다. 그렇기에 파시즘을 두고 “전구 하나밖에 못 켜는 발전소”라거나 “무거운 진흙 주전자에 달린 약한 손잡이”라는 식의 평가를 내리는 것도 실없는 소리가 아닌 것이다.

한편, 이 책이 독재의 동의적· 대중동원적 차원을 “문명화된 파놉티콘의 전방위적 감시 체제”와 근대적 국민주권론으로 설명하는 대목도 유익하고 계몽적이기는 하지만 논란을 불러일으킴 직하다. 왜냐하면 대중에게 동의를 구하고 그들을 동원하며 주체화하는 과정은 이미 그람시나 푸코와 같은 이론가들이 탁월하게 밝혔듯이 독재의 전유물이 아니라 근대 권력 일반의 속성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는 대중을 근대 주체로 구성하면서 국민주권을 관철시키는 ‘방식’이 전체주의적/독재적/권위주의적이냐, 아니면 다원주의적/민주주의적/자유주의적이냐 하는 것이다. 이 차이는 분명 사소한 것이 아니다. 물론 파시즘과 독재를 근대 권력의 속성과 근거로 설명하는 것은 그것들을 반근대적 현상으로 보는 견해에 대한 비판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니까 파시즘과 독재를 근대 권력의 지형도 위에서 파악하는 것이야말로 이 책이 갖는 진정한 장점과 가치다. 그럼에도 근대 권력이 구현되는 ‘방식’의 차이를 논하지 않는 한 근대 국가와 근대 독재를 혼동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혐의를 받기 쉽다.

인식의 모호함은 실천의 모호함을 낳는다. 즉 제도적인 수준에서 작동하는 독재의 억압 기제와 심리적-신체적인 수준에서 작동하는 근대적 규율 권력의 억압 기제가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양자는 공존하면서 서로를 제한하고 구속하며 변형시킨다. 따라서 진정 문제가 독재와 관련된 것이라면, 강압적 지배 기구에 대한 비판 없는 내면적 반성은 공허하며, 내면적 반성 없는 강압 기구에 대한 비판은 맹목일 것이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대중독재’가 대중에 ‘의한’ 독재이면서 동시에 대중에 ‘대한’ 독재임을 새삼 확인해둘 필요가 있어 보인다.

물론 이 책의 실천적인 문제의식, 그러니까 근대 독재의 광범위한 대중적 동의 기반을 밝혀냄으로써 “소수의 사악한 가해자 대 다수의 선량한 희생자”라는 허구적인 이분법을 극복하고 “과거를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사회적 기억”을 만들어내는 것은 완전히 타당하다. 반독재 저항이라는 소수의 경험을 다수의 경험으로 둔갑시키려는 정치적 편의가 우선시되면서 일반 대중이 독재와 공모하고 그것에 연루된 역사가 망각됐고, 그런 정치와 역사의 괴리 속에서 독재자에 대한 향수가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성숙한 시민 의식의 발전이 저해된 것이 사실이니 말이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철저한 내면적 ? 역사적 반성은 독재와 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적 현실과의 대면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올바른 역사 교육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으며, 거꾸로 정치적 비판은 본질적으로 역사적이어야 한다.

필자는 서울대에서 서양사를 전공해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논문으로 ‘19세기 이탈리아 농촌공업화와 ‘유연한 이행’: 비첸티노 지방의 직물공업을 중심으로’, ‘이탈리아 만들기, 이탈리아인 만들기: 리소르지멘토와 미완의 국민 형성’,  ‘무솔리니: 두체신화, 파시즘, 이탈리아의 정체성’ 등이 있고, 역서로는 ‘종말의 역사’(공역), ‘만들어진 전통’(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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