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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향기
안개향기
  • 최승우
  • 승인 2021.12.31 09: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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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길 지음 | 도서출판등 | 304쪽

비밀이었던 흔적을 풀어내는 서사적 장치
- 조동길 소설가 『안개 향기』에서 우러나는 고요함

우리는 한 동안 아무 말도 없이 각자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내 마음의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처럼 여자와 주고받은 말들이 작은 파문을 일으키며 널리 퍼져 나갔다. 그 물결은 오래도록 가라앉지 않고 계속 찰랑거렸다.

조동길 소설가의 새 창작집 『안개 향기』의 한 대목이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오래 동안 가슴에 묻고 살아온 기억을 지니고 있다. 그 기억들은 돌멩이로, 모래 한 줌으로, 풀꽃으로, 코스모스로, 안개로 남아 삶에 배어 있다. 분노와 슬픔, 지독한 고통을 견디지만 잊을 수 없는 깊은 흔적이다. 그럼에도 혼란의 이 시대를 살아오면서 위축된 삶을 오히려 제 정신을 곧추세우게 하고 당당히 맞서게 하는 것은 흔적을 풀어내는 발설의 화해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미 비밀이 아니고 저녁 안개처럼 포근한 향기로 다가선다. 그것은 자칫 송두리째 무너질 위기를 환하게 웃으며 지켜내는 자부심이 되니 경건하고 산뜻하다.

우리가 소설을 왜 읽는지 새삼 되묻고 싶다. 재미를 찾고, 욕망을 충족하는 것이라면 굳이 소설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널려있는 현실이다. 하지만 소설은 또 하나의 사유체계를 보여준다. 소설은 왜곡된 현실을 바로잡고, 지나왔거나 앞으로 나아갈 삶을 재구성하는 과정일 것이다. 그러니 소설은 재발견의 서사적 장치다.
비극적 운명을 이기지 못하고 죽은 아내와 딸의 골분을 챙겨 둔황 석굴을 향하는 투루판 벌판에 온 사내는 대성통곡한다. 마침내 골분을 날려 보내자 거친 바람결이 잦아들고 찌푸렸던 하늘이 열리며 가랑비가 내리며 포근하게 사내의 몸을 적신다. 조화가 아닐 수 없다. 광장의 흐름에서 우연히 만난 여인은 첫사랑이 간직해온 편지를 지니고 있으니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사랑에서 비롯된 기억이 소설로 극화될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다. 양식도 주고, 공부도 시켜주고 돈도 번다는 말에 현혹되어 언니를 정신대에 보낸 아우는 평생 돌멩이 하나를 가슴에 안고 산다.

그 돌을 떼 내지 못하는 아픔을 풀어내는 것은 그 때는 그랬다는 참으로 고통스런 자기 고백이다. 조상의 제사를 목숨으로 지켜내려는 노인은 홀로 죄스러운 제사를 올리며 정신줄을 놓는다. 하지만 노인을 맞이하는 이가 있다. 갓을 쓴 아버지. 아버진 노인을 편안히 인도한다. 아버지를 따라나서자 흰옷 차림의 작은아버지, 고모들이 맞아준다. 고백으로 돌을 떼어내는 것이나 제를 올리는 행위는 모두 주술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은 빠르게 바뀐다. 어제의 질서는 오늘 구태가 되고 오늘의 확신은 내일 흔들리는 갈대가 되는 세상이다. 기존의 가치와 규범이 혼돈의 세상에서 회오리바람에 휘말려 마구 솟구치고 패대기치는 형편이다. 그럼에도 이 세상을 온전히 지탱하는 두 기둥은 삶의 근본을 찾는 휴머니즘과 자신을 끊임없이 되돌아보는 반본, 거대한 자연의 흐름을 따라가려는 원시성이 아닌가 한다.
『안개 향기』는 평소 ‘소설 쓰는 소설교수’로서의 면모를 견지했던 조동길 소설가의 화두, 기억으로부터 삶의 근본을 이끌어내려는 인간 근원성 탐구와 자연과 현상의 관계를 풀어내는 원시반본의 과정을 소설로 풀어내려는 의도를 되새기게 한다. 참으로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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