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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자격시험 없애고 300페이지 ‘포트폴리오’를 만든 이유
박사자격시험 없애고 300페이지 ‘포트폴리오’를 만든 이유
  • 허유성
  • 승인 2022.07.05 09: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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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듀크대 사학과 박사과정 후기

2005년 박사자격시험 폐지·포트폴리오 도입·교과과정 개편
교육학·공공역사 전면에 내세워… 티칭에 대한 새로운 철학

 

미국의 박사과정생들에게 티칭(teaching)은 늘 부담이다. 티칭이란 수업을 하는 데 필요한 일련의 활동을 광범위하게 칭하는데, 미국에선 교수뿐만 아니라 흔히 TA(teaching assistant, 교육조교)라고 부르는 대학원생 조교들까지 티칭의 주체로 본다. 자기 논문 쓰기도 바쁜 이 조교들은 매주 학부생들의 토론을 주관하고, 때마다 수십 명의 과제와 시험답안을 채점하고, 심지어 교수가 할당해주는 강의까지 한다. 교육열이 높은 교수의 강의에 배정되기라도 하면 업무의 강도는 더 높아진다. 

내가 전공하는 역사학은 글쓰기를 중시하는 만큼 학부생들에게 수준 높은 에세이나 소논문을 과제로 요구하는데, 그래서인지 어떤 교수들은 과제작성 과정에서 최소 몇 회 이상 조교들과 면담할 것을 주문한다. 그렇게 완성된 과제와 중간·기말고사 답안에 섬세하고 친절한 장문의 피드백을 제공하는 것은 교수와 학생들로부터 학기 말에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한 TA의 필수 덕목이다. 이러다 보니, 말하기 좋아하고 질문도 많은 미국 학생들을 ‘티칭’하는 건 나처럼 영어가 어눌한 유학생에겐 적잖은 스트레스다. 처음엔 교수나 학생이나 한낱 박사과정한테 뭘 이렇게 많이 바라나 싶었다.

티칭, 가혹한 취업시장에 직면한 ‘생존의 기술’

느닷없이 티칭에 관한 넋두리를 늘어놓은 건 미국으로 유학 온 김에 TA 썰이나 풀어보자는게 아니다. 조교의 교육학적 역할에 대한 몰이해와 서툰 영어 실력이 빚어내는 민망하고 고통스런 TA 경험이야 박사유학생들에겐 통과의례다. 사실 내게 신선했던 건 ‘대학원생들의 티칭’ 자체가 아니라 그에 대한 ‘교수진과 학과의 시각’이었다. 연구와 교육 사이에서 균형 잡힌 경력을 쌓는 건 교수들뿐만 아니라 박사과정생들에게도 중요한 덕목이지만, 사실 학과의 입장에서야 박사과정생들의 티칭은 고용계약 상의 업무 배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내가 속한 듀크대 사학과는 박사 교육과정의 틀 내에서 티칭에 보다 큰 의미를 부여한다. 좀 거창한 말로 표현하면, 여기서 티칭은 역사학이라는 학문 자체의 지속가능성과 학문후속세대의 미래를 위해 학과가 박사과정생들에게 가르쳐야 할 핵심 중 하나다. 그렇다고 연구보다 티칭을 중시하는 건 아니지만, 가혹한 취업시장에 직면해 유연한 활로를 모색해야하는 역사학의 특성상, 이곳의 사학과와 사학도들에게 티칭은 이를테면 생존의 기술에 가깝다.

300페이지 포트폴리오에는
박사논문계획서와 교수철학·교수방법론·복수 강의안 포함 
서평·역사칼럼··구술사 인터뷰 등 대중 역사학 장르 아울러
팟캐스트·블로그·유튜브 등 대중친화적 매체 역사 컨텐츠도

박사자격시험 없이 3년 차에 ‘포트폴리오’ 제출

먼저 학위취득 과정에서부터 티칭의 무게감이 다르다. 익히 알려져 있듯,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려면 크게 세 가지 관문을 넘어야 한다. 먼저 1년 차 혹은 2년 차에 그 악명 높은 ‘퀄’(qualifying exam, 박사자격시험)을 통과하고 나면, 3년 차가 끝나는 시점에 박사논문계획서를 심사받는다. 이를 ‘프릴림’(preliminary exam)이라 부른다. 퀄이 전공분야에 대한 종합적 지식을 구술 및 서술 형태로 시험한다면, 프릴림은 학생 스스로 독립적 연구를 수행할 준비가 되어있는지를 평가한다. 3년 안에 이 두 시험을 차례로 통과한 학생들은 예비박사 단계(Ph.D. candidacy, 박사수료)로 넘어간다. 이를 달리 ABD(all but dissertation)라고도 부르는데, 글자 그대로, 학위의 마지막 관문에 해당하는 학위논문만 쓰면 된다는 뜻이다.

듀크대 사학과의 박사과정은 이 전통적인 틀에서 조금 벗어나 있다. 퀄을 보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1~2년 차에 봐야하는 퀄이 3년 차 프릴림에 통합되어 있다. 예비박사 단계로 향하는 관문을 줄이고, 이로써 학생들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겠다는 취지다. 단, 학생들은 퀄을 치르는 대신 지난 3년간의 학업과 연구결과를 교수들에게 검사받고, 박사논문계획서와 함께 포트폴리오 형태로 묶어서 제출한 후 프릴림에서 최종적인 심사를 받아야 한다. 학생들이 제출해야하는 포트폴리오는 평균 300페이지에 달하지만, 그래도 이제 막 박사과정에 들어선 학생들 입장에서야 어쨌든 시험 한 번을 덜 치러도 되는 셈이니 처음에는 반가울 따름이다. 

교육학·공공역사 강조하는 포트폴리오와 교과과정

하지만 다소 특이해 보이는 이 포트폴리오 제도가 단순히 절차적 간소화만을 의도한 것은 아니다. 포트폴리오에는 학위논문계획서, 연구논문, 연구사 논문(historiographic essays), 연구의제(intellectual agenda)처럼 사학과가 일반적으로 퀄과 프릴림에서 요구하는 글들 외에도 교수철학(teaching statement), 교수방법론, 그리고 복수의 강의안들이 포함되어야 한다.

또한 서평, 역사칼럼, 역사논평, 구술사 인터뷰 등 대중 역사학적 장르를 아우르는 지난 3년간의 글들도 모두 집적되어야 한다. 심지어 팟캐스트, 블로그, 유튜브처럼 보다 대중친화적인 매체들을 겨냥한 역사 컨텐츠들도 포트폴리오의 대상이다. 쉽게 말해, 듀크대 사학과는 포트폴리오 제도를 통해 교육학(pedagogy)과 공공역사(public history)를 박사프로그램의 전면에 내세웠다.

교과과정을 보면 이러한 철학은 더욱 두드러진다. 포트폴리오 제도 도입은 2005년에 단행된 학제 개편의 일부였고, 이때 교과과정도 함께 수정되었다. 그 결과 현재 듀크대 사학과는 독특하게도 ‘이론 및 사학사’와 ‘방법론’ 외에 ‘교육학’을 필수 이수과목으로 두고 있다. 이 수업은 교수법과 더불어 공공역사의 방법론을 다루는데, 여기서 티칭은 교육기관의 제도적 울타리를 넘어서는 개념으로 이해된다. 중·고등학교의 수업, 대학의 전공강의, 그리고 대중강연 혹은 대중적 글쓰기는 전문지식을 비전문인들과 공유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지 않다. 교육학 수업을 담당해왔던 크리스텐 노이셸(Kristen Neuschel) 교수가 역사교육학과 공공역사는 궁극적으로 같은 범주라고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국 듀크대 전경. 사진=위키미디어

학계 현실·후속세대 미래 반영해 기존 관습 바꿔

미국의 대표적인 연구중심대학의 사학과가 박사 교육과정에서 교육학과 공공역사를 이처럼 강조하게 된 배경에는 나름의 현실적인 고민들이 있었던 것 같다. 2000년대 중반부터 미국의 인문사회과학계는 대학들이 학계 취업시장의 규모에 비해 박사급 인력을 과잉공급하고 있다는 비판을 제기해왔다. 이러한 비판에 공감하면서, 미국의 주요 대학 내 사학과는 박사를 양성하는 목적과 책임감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인문학뿐만 아니라 자연과학 학과들도 참여한 Carnegie Initiative on the Doctorate이 좋은 예다. 

듀크대 사학과가 기존의 교육과정에 의문을 제기했던 것도 이즈음이었다. 퀄을 비롯해 관습적으로 유지되어 오던 제도들이 학계의 현실과 학문후속세대의 미래를 진지하게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교수임용시장이 침체된 상황에서 박사과정생들이 근래에 학계 ‘안’에서 자리 잡을 수 있을 거라 낙관하기보다, 그들이 다양한 활로를 모색할 수 있도록 교육과정 자체를 개선하는 노력이 필요해보였다. 

 ‘자신이 뽑고 키워내는’ 박사 미래에 대한 책임감

퀄 폐지, 포트폴리오 도입, 교과과정 개편은 그러한 노력의 결과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교육학과 공공역사를 포괄하는 티칭에 대한 새로운 철학이 있었다. 당시 대학원프로그램 담당교수였던 에드워드 밸리슨(Edward Balleisen)은 오늘날 제도적 역사학이 취업난의 장기화, 학제간 연구의 전문화 경향, 그리고 전문역사학과 대중적 관심 사이의 간극 심화라는 복합적 난관에 직면한 상황에서 단순히 지식을 테스트하려는 퀄과 연구역량 향상에만 방점을 둔 교과과정은 지속가능한 교육모델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역사학과 고등교육을 유연화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학제 개편은 티칭을 강조함으로써 박사과정생들이 훗날 학계 안에서뿐만 아니라 다양한 영역에서 역사교육자와 신뢰할 수 있는 대중역사가로 활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것이 학문후속세대에게 보다 현실적이고, 대중들의 요구에 부합할 만큼 다양하며, 궁극적으로 제도적 역사학에 지속가능한 모델이라고 여겼다. 

물론 이러한 모델의 성과는 가시적이지 않다. 무엇보다 논문이나 연구자금처럼 정량적으로 지표화하는 것이 쉽지 않다. 게다가 학계 밖에서 역사가들의 직업이란 대체로 제도화되어있지 않고, 안정적으로 연구를 이어가는 데도 어려움이 있다. 성과가 중요한 학과의 입장에선 모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뽑고 키워내는 박사인력들의 미래에 대한 책임감이 엿보인다. 구조적 위기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이들 중 일부가 겪게 될 임용실패를 개인의 역량 부족으로 치부해버리는 능력주의의 미신에 사로잡히는 대신, 전통적 관습과 시스템을 수정하는 과감한 결단력도 돋보인다. 

한국 인문학계의 취업시장에 혹한기가 지속되고 있다. 듀크대 사학과의 철학과 책임감이 구조적 위기에 놓인 한국 인문학계와 그 고등교육에 작은 울림이 되었으면 한다. 

허유성 객원기자·듀크대 사학과 박사수료
고려대 사학과에서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은 후 듀크대 사학과에서 ‘냉전기 독일의 과학기술사’를 주제로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현재는 독일 포츠담현대사연구소(ZZF)에 방문연구원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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