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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피카 스쿨
토피카 스쿨
  • 최승우
  • 승인 2022.07.08 16: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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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러너 지음 |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428쪽

남자애들이 다 그렇지.
버릇이 나빠진 건 그냥 버릇이 나빠진 거지.

페미니스트로 성공하지만
‘남근 선망’을 한다는 야유를 받는 어머니

아내의 성공으로 ‘거세당한 남성’의 기분을
묻는 질문에 난감한 아버지

전국 토론 챔피언이자 미래의 아이비리그 학생이면서
은밀한 일탈과 보이지 않는 힘겨루기를 즐기는 아들……

발라버리고 갈라치는 말과 혐오의 시대,
페미니스트 어머니와 ‘남자들’의 목소리 사이에서
소년은 어떻게 어른이 되어가는가?

심리상담가의 소파에 누워 있는
‘특권의 미아들’, 그들은 누구인가?

두 딸아이의 아버지인 애덤은 반의식적으로 놀이터를 훑어본다. 아이들을 괴롭힐 만한 녀석이나 바닥에 깨진 유리가 있는지 확인한다. 놀이터 시설의 높이와 이런저런 추락에 따를 수 있는 부상을 머릿속에 새겨놓은 뒤 잠깐 휴대폰 메시지를 확인한다. 그때 미끄럼틀에서 큰 소리가 들려온다. 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미끄럼틀 위에서 발을 쾅쾅 굴러대며 말한다 “미끄럼틀은 남자용이야, 여자는 미끄럼틀 못 타. 저리 가.” 애덤이 소년에게 다가가 말한다. “여자애들도 미끄럼틀을 타게 해주면 어떨까?” 그러자 그애가 말한다. “안 돼요. 이 여자애들은 멍청해요. 그리고 못생겼어요. 못생기고 멍청한 여자애들은 안 돼요.” 소년의 아버지는 아이를 제지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저 휴대폰 화면만 들여다볼 뿐이다. 머릿속에서 ‘남자들’의 목소리가 말한다. “남자애들이 다 그렇지. 버릇이 나빠진 건 버릇이 나빠진 거지. 딸들에게 그네를 타라고 하렴. 대립을 통해서 얻을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려주렴……”

문학계가 주목하는 “소설의 미래”, 미국의 젊은 작가들을 사로잡은 소설가 벤 러너의 장편소설 『토피카 스쿨』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의 작품이다. 시인이자 소설가 벤 러너는 만 사십 세가 되기 전에 ‘천재 예술가 그랜드슬램’으로 알려진 풀브라이트 장학금, 구겐하임 펠로십, 맥아더 지니어스 펠로십을 모두 수혜하기도 했다. 2019년 10월에 출간된 『토피카 스쿨』은 ‘버락 오바마 선정 올해의 책’, 〈뉴욕 타임스〉 〈타임〉 〈워싱턴 포스트〉 ‘올해의 책 TOP 10’을 비롯해 스무 곳이 넘는 언론사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며 그야말로 그해 올해의 책 리스트를 휩쓰는 기염을 토했다. 로스앤젤레스 북 어워드를 수상하고 퓰리처상과 전미비평가협회상 최종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페미니스트 어머니와 ‘남자들’의 목소리 사이에서 어른이 되어가는 한 소년의 성장기이자 발라버리고 갈라치는 말과 혐오의 시대, 분노로 들끓으며 분열하는 세계, 심리상담가의 소파에 누워 있는 ‘특권의 미아들’에 대한 날카롭고도 탁월한 통찰을 보여주는 전혀 새로운 경지의 메타픽션.

발라버리기_애덤

십대들은 점점 흔해지는 전문 의약품 TV 광고가 끝날 때마다 나오는 경고 문구를 들었다. 약물의 위험성에 관한 정보가 이해하기 어렵게 빠른 속도로 공개되었다. 또 라디오 광고가 끝날 때마다 규칙과 절차 준수 의무 목록을 빠른 속도로 읽어젖히는 것도 들었다. 금융기관과 의료보험회사에서 받는 ‘작은 글씨’에도 조금은 익숙했다. 그 수천 개의 단어로 절대 못할 일이 있다면 바로 그 단어들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이런 식의 공개는 은폐를 위해서 고안된 것으로, 문제의 기관에 이의를 제기할 경우 빠른 토론대회에서 ‘반박을 포기한 주장’으로 취급될 만한 정보를 내놓았다. 정보가 제시된 당시에 반박하지 못했으니 쟁점의 타당성을 인정한 셈이라는 것이다. 반박할 시간이 없었다는 건 변명거리가 못 됐다. 미국인들은 이십사 시간 뉴스와 몰아치는 트윗(트위터는 사람들이 머뭇거리는 동시에 빠르게 말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알고리즘 매매, 스프레드시트, 디도스 공격이 일어나기 전부터 일상적으로 ‘발렸다’. 한편, 미국의 정치인들은 계속해서 자신의 정책과 무관한 가치에 대해서는 천천히, 느리게 이야기했다. _본문 38쪽

1997년 켄자스시티 토피카고등학교 졸업반인 애덤은 전국 토론 대회 챔피언이다. 그를 토론과 연설 일인자로 만들어준 것은 바로 ‘발라버리기’ 기술이다. ‘발라버리기’란 상대편이 제한된 시간 내에 응답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주장과 더 많은 근거를 갖다붙이는 토론 기술을 말했다. 주장과 근거의 질이나 내용은 상관없었다. 더 빠르게, 더 많은 내용을 말하는 것, 그래서 상대가 ‘반박을 포기한 주장’이 더 많이 나오도록 유도하는 게 중요했다. 그래서 토론자들은 말을 빠르게 쏟아내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 내용을 이해하는 것은 포기했다. 이해하다보면 말이 느려지니까.

애덤은 토론 챔피언인 동시에 모든 과목에서 A를 받는 모범생이고 시를 읽고 쓸 줄 알았으며 어쩌면 아이비리그에 진학하고 나중에는 의회로 진출할지도 몰랐다. 게다가 그는 또래의 마초문화에도 적극적이었다. 규칙적으로 웨이트트레이닝을 했고 운동 후에는 단백질셰이크를 잊지 않았다. 또래 남자아이들과의 보이지 않는 힘겨루기에서도 절대 겁먹은 기색을 보이거나 뒤꽁무니를 빼는 법이 없었다. 그는 상대를 훑으며 머릿속으로 상대의 체급을 가늠하고 이런저런 레슬링 기술을 시뮬레이션했다. 언제든 몸싸움을 벌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또한 친구들과의 일탈도 기꺼이 즐겼다. 그 덕에 부모에게는 자랑스러운 아들, 또래 사이에서는 ‘쿨한 친구’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이중 플레이가 언제나 효과적으로 작동하진 않았다. 모든 비뚤어진 욕망과 현실과 상상 속 갈등 상황에서 오는 스트레스, ‘진짜 남자’로 보여야 한다는 중압감, 언제든 침대에 누워 엄마를 찾는 어린애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극심한 편두통을 앓곤 했다.

남자들_제인

전화를 건 ‘남자들’은 내가 여보세요, 라고 말하면 나를 다양한 종류의 쌍년이라고 부르기 위해서 목소리를 귓속말 수준으로 낮추었어. 나는 들리지 않는 척했지. “죄송한데, 크게 말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러면 보통 혼란스러워하면서 뭐든 자기가 했던 말을 조금 더 큰 소리로 되풀이했단다. 나는 그 남자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렸지만 똑같이 공손하게, 이 전화의 성격을 알고 있다는 내색을 전혀 하지 않고 말했지. “죄송하지만 연결 상태가 좋지 않은가봐요. 조금만 더 크게 말해주실 수 있을까요?” 나는 계속해서 그 찌질이한테 목소리를 높여달라고 공손하게 부탁했지. 그는 메시지를 한두 번쯤 되풀이하다 결국 자기가 하는 말을 듣고 너무 당황한 나머지-아니면 그냥 누가 엿들을까봐 걱정했던 걸지도 몰라, 이런 남자 중 옆방에 아내나 딸이 있는 남자가 몇 명이나 됐을지 모르겠구나-목소리가 떨리거나 갈라지곤 했어. 대부분은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지. 수치심이 밀려와서 그랬을 거야. _본문 138쪽

애덤의 엄마 제인은 성공한 페미니스트이자 심리상담가다. 동료들은 그녀의 성공을 두고 ‘남근 선망’이라느니 뒷말을 해댔고 그녀가 하는 말, 행동 하나하나를 ‘남근을 갖기 위한 노력’으로 분석했다. 그리고 집으로 익명의 남자들이 전화를 걸어오기 시작했다. 제인이 전화를 받으면 그들은 거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온갖 욕설을 퍼부어댔다. 그들은 제인이 그들의 결혼생활을 망친 쌍년이라는 점을, 그녀 같은 쌍년들, 페미나치들이야 말로 요즘 여자들의 문제라는 점을, 쌍년들은 입을 닥쳐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제인은 ‘남자들’의 전화를 처리할 기술을 발명한다. 제인은 전화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척 그들에게 거듭 목소리를 높여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 ‘남자들’은 결국 자신이 내뱉은 말에 너무 부끄럽고 당황한 나머지 전화를 끊어버리곤 했다.
어느 날 아들 애덤이 사고로 뇌진탕을 일으킨다. 의식을 잃고 병원 중환자실 침대에 누워 있는 아들을 보며 제인은 기도했다. 하느님께 빌었다. 더 높은 힘을 향해 약속했다. “애덤을 살려주세요, 그애만 무사하다면 다시는 글을 쓰지 않을게요.” 그녀의 머릿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말했다. “당신 남편이 불쌍해, 아들이 불쌍해. 당신이 그런 책을 쓰지만 않았다면 아들은 무사했을 텐데.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제인은 계속 기도했다. “맞아요, 그 말이 맞아요. 나는 나쁜 아내, 나쁜 엄마, 나쁜 딸이고, 가정파괴범이에요. 그냥 애덤만 괜찮게 해주세요. 그럼 말 잘 들을게요……”

특권의 미아들_조너선

그애들에게는 냉장고 가득 음식이 있고 에어컨과 TV도 있었다. 또한 낙인이나 국가적 폭력으로부터도 자유로웠다. 그 아이들이 고통의 정체를 모른다는 점보다 명백한 사실이 있을까? 그들에게 뭐든 고통이 있다면 그건 바로 고통의 결핍이었다. 너무 편해서, 너무 설탕을 많이 먹어서 생긴 일종의 신경장애, 존재론적 통풍. 그 아이들은 속 빈 강정이었다. 한마디로 그들은 너무 배가 불렀다. 한마디로 그들은 배가 고팠다. _본문 91쪽

신경증적인 부모들이 걱정하는 대로 그런 음악들을 천천히 거꾸로 재생했을 때 정말로 가사에서 사탄의 메시지가 드러난다면 얼마나 쉬웠을까. 아무리 음침하다 해도, 공허함에 대한 분노 대신 거꾸로 녹음해 숨긴 비밀스러운 질서가 있었다면. _본문 89쪽

애덤의 아버지이자 제인의 남편 조너선 역시 심리상담사였다. 그의 환자들은 대개 십대 소년이었는데, 유난히 그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부류가 있었다. 바로 안정적인 가정의 인텔리 중산층 백인 아이들. 누구보다 ‘정상적인’ 환경에서 부족함 없이 자란 아이들. 민주적인 가정에서 부모에게 엉덩이 한 대도 맞아본 적 없이 사랑받으며 자란 아이들. 이런 아이들은 모범적인 학교생활과 탁월한 성적을 보여주다가 보름 사이에 급격히 망가지더니 순식간에 수업을 빼먹기 시작하고 대마초 냄새를 풍기곤 했다. 부모가 대체 왜 그러는지 설명해보라고 하면 입을 꾹 다문 채 자기 방으로 향했다. 그러더니 어디서 슬쩍한 독주를 들이붓고는 부모의 차를 몰고 나가 길거리에 주차된 다른 차를 박아버리고, 판사로부터 소년원에 가든지 정신과 치료를 받으라는 얘기를 듣게 되는 것이었다.

조너선은 멍청하진 않지만 재능이 뛰어나지도 않은 사람, 매일 길에서 마주치는 집합적 얼굴의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대화를 이끌어가는 솜씨가 좋았다. 대화의 물꼬를 트고, 서로의 견해를 나누고, 견해의 차이를 인정하고 상대에게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전할 줄 알았다. 그래서 제인과 달리 동료들은 물론 이웃 사람들과도 잘 지내는 편이었다. 친절한 대화가 남자답지 못한 것으로 여겨지는데도 상관하지 않는 듯했다. 간혹 제인의 성공 때문에 ‘거세당한 남성’의 기분을 물어오는 질문에 난감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아내의 페미니즘과 성공을 지지했다. ‘남자들’의 전화에 제인보다 더 분노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결정적인 방식으로 아내를 배반했다. 아내의 친구와 외도를 저지른 것이다.

“분노에 차 있지만 결국 사랑에 대한 이야기.”

머리 양옆은 바짝 깎고 나머지 머리카락은 포니테일로 당겨 묶은, 미소조차 짓지 않은 이 열일곱 살짜리 소년은 누구일까? 부모의 좌익 성향과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공화당 지지 주의 타협이 재앙에 가까운 헤어스타일로 나타난 것일까? 소년은 엄청난 속도로 거의 자기만 알아듣는 언어를 말한 대가로 딴 메달을 목에 걸고 있다. 이 사진 속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무얼 느끼고 있을까? 무엇이 이 장면으로 이어졌는지부터 이야기해보자. _본문 42쪽

『토피카 스쿨』은 혐오와 분열의 시대, 발라버리고 갈라치는 말들로 가득한 작금의 상황이 어떻게, 왜 일어나게 되었는가에 대한 첨예한 보고다. 작품 속 ‘발라버리기’는 듣는 상대의 반응을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인 방식이며 상대의 입을 다물게 하는 말하기다. 정보는 과다할수록 언어의 기능은 붕괴된다. 언어의 본래 목적인 소통을 저버린 채 오히려 불통을 유도한다. 또한 오직 이기기 위한 방편이며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논리에 따른 말하기 방식이기도 하다. 작가는 한때 미국 정치인 혹은 논객이 자주 쓰던 무기였고 트럼프 시대의 도래와 몰락을 함께했던 ‘발라버리기’가 정치, TV 광고, 온라인, 일상의 대화에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상황을 짚어내고 더불어 미국 백인-남성 정체성의 위기, 레드넥의 출현과 뉴라이트의 부상, 백래시 현상에까지 나아간다.

또한 이 작품은 가족과 사랑, 성장, 희망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애덤의 성장기는 ‘특권의 미아들’의 성장기를 대변한다. 자유주의 세대보다 더 자유로운 세대라는 그들은 민주적인 가정환경과 물질적 풍요 속에서 자랐다. 그러나 수많은 선택지 사이에서 방황하고 배가 부른 동시에 배가 고프다. 그들에게는 고통의 결핍이 고통 그 자체다. 페미니스트 어머니와 ‘남자들’의 목소리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던 아이가 어떤 어른으로 성장할 것인가, “남자애들이 다 그렇지”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잔존하는 세상에서 ‘착한 아들 키우기’는 과연 가능한가, 서로를 발라버리고 서로에게 발리는 말하기의 대안은 존재하는가, 혐오로 들끓으며 분열하는 지금 소통과 화합, 연대를 이룰 방법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에 대해 작가 벤 러너는 실오라기 같은 희망을 제시한다. 이 작품을 통해 작가의 메시지를 고민하고 나누는 것이 분노로 가득찬 세계에 종말을 고하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오늘날 가장 명석하고 야심차고 혁신적이며 시의적절한 작가의 가장 명석하고 야심차고 혁신적이며 시의적절한 소설”이자 “분노에 차 있지만 결국 사랑에 대한 이야기.”

최승우 기자 kantmania@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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